사는 이야기/말 없는 말

겨울 소나무

무설자 2008. 12. 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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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한 장 남은 달력이 추워 보입니다. 열두 장을 넉넉하게 두고 시작했던 일년이 어느새 지나버리고 달랑 한 장이 남아 저를 쳐다봅니다. 어느 해보다 바삐 살았던 한 해였건만 이렇게 회한이 몰려오는 건 왜일까요?

 

아직 본격적으로 추위가 온 것도 아닌데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한기는 한 겨울 삭풍 앞에 선 것보다 더 춥습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을 탓할 것만은 아니지만 어떻게 이 추위를 감당해야할지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올 겨울은 몸과 마음이 함께 제대로 추위를 감당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설계를 해서 한참 짓고 있는 병원건물을 감리하기위해서 한달에 두세 번 안동을 다녀옵니다. 대구를 지나 중앙고속도로 변을 달리다보면 나지막한 산의 풍경이 정겹게 펼쳐집니다. 요즘 같은 때는 산도 정겹게 다가오길 바라는 마음인지 그런 산을 보는 것이 참 편안합니다.

 

그 산이 겨울이 되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온통 녹음이 가득할 때는 보이지 않다가 단풍이 지고 나니 우뚝우뚝 솟아오르듯 제 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들입니다. 활엽수 사이에서 풍채 좋게 서 있는 소나무들입니다.

 

소나무 숲에 있는 소나무들이야 겨울이라도 따로 보일 게 없지요. 하지만 활엽수가 많은 산의 소나무는 잎이 한참일 때는 그 속에서 견뎌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상록수와 달리 활엽수는 그 성장 속도가 빠르기에 그 틈을 비집고 자라 저 풍채를 만든 게 대단해보입니다.

 

겨울 소나무, 몇 십 년을 먹었는지 몰라도 당당한 소나무 특유의 풍채를 자랑하듯 드문드문 서있는 모습은 아주 멋집니다. 잎을 다 떨어뜨리고 난 나목 사이에 당당하게 서있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그 앞에 머리를 숙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게 한 겨울 추위를 푸른 모습을 유지하면서 이렇게 나처럼 이겨내라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병원을 짓는 건설회사의 사장과 동승을 했습니다. 그 분은 지금 이 불황에도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 회사는 지난 IMF 때도 일을 끊이지 않았다고 하면서 오히려 세상이 어려울 때 더 일이 많다고 합니다. 아이러니지만 경기가 좋을 때보다 불황일 때가 더 수주가 잘 된다고 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겨울 소나무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위 앞에서 잎을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견디는 활엽수로 가득한 한겨울 산의 분위기, 지금 경기 앞에서 움츠리는 요즘 세상 분위기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겨울 소나무처럼 더 빛나는 존재입니다.

 

기본에 충실하고 부지런하기에 그는 항상 경기에 연연하지 않고 평상심으로 일을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려움이 닥치면 집을 지으려는 사람들도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시공자를 찾게 되니 더 큰 경쟁력을 가지게 되나봅니다. 그의 계절에는 겨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으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그 중에서 겨울 소나무 같은 분들을 봅니다. 예순이 넘어 일흔의 연세에도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리고 열심히 댓글을 달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육신의 나이를 잊고 사는 분들입니다. 가끔 통화나 만남에서 젊은 분들에게 민망하다는 말씀을 하시지만 겨울 소나무처럼 당당한 모습을 봅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의 이 말씀을 겨울 소나무가 제게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신세타령을 해대는 하는 제가 부끄러워집니다. 세상에 스승 아닌 이가 없음을 겨울 소나무를 통해, 제가 만나는 분들을 통해 저의 부족함을 살피면서 알게 됩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듯이 쉽게 할 수 있듯이 사는 이들은 세상이 요즘처럼 어려워지면 움츠려서 제 모습을 숨길 수밖에 없지요.

 

별 수 없이 숨듯이 살고 있는 제게 겨울 소나무 같은 그 분들이 주변에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저를 다시 한번 돌아봅니다. 지금 세상에 몰아치고 있는 이 한파가 쉽사리 가라앉을 것 같지 않습니다. 연말연시라는 한해의 마디를 짓는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생각해봅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다시 읇조려봅니다.

잎 떨어진 겨울 산에 우뚝 서있는 소나무를 생각하면서 그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창 밖에 부는 찬 바람이 따뜻한 차 한 잔의 맛을 더해줍니다.

 

조계총림 송광사 부산분원 관음사사보 늘기쁜마을 12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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