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손에 놓지 않고 쓰던 그릇을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손에서 벗어나는 순간 바닥으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쨍’하는 소리와 함께 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제 자리 주변으로 파편이 온 사방에 깔려 있습니다.
아주 순식간에 그릇은 온데간데없고 조심스럽게 치워야 할 유리조각만 남아 있습니다. 잠깐 부주의가 그릇의 생명을 다하게 했습니다. 비싸지 않은 그릇이기에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치워야 할 일이 생겼음을 짜증스러워 했습니다.
값비싼 그릇이었다면 소중한 것을 잃었음에 안타까워했겠지요. 그렇더라도 이 그릇으로 몇 년간 차를 마셨는데 값으로 쳐서 안타까움과 귀중함이 그렇게 나누다니 저도 할 수 없는 속물인가 봅니다. 그 그릇이 사람이었더라도 그렇게 액면가로 가치를 쳤을까요? 이 물음에 대해서는 쉽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그 날 제 주변의 것을 하나 잃어 버렸습니다.
부처님과 라훌라 존자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부처님의 아들 라훌라는 출가 후에도 행동이 거칠고 거짓말을 잘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왕사성 죽림정사에 계셨을 때, 라훌라도 그 근처 숲 속에 살고 있었는데, 누가 와서 부처님이 계신 곳을 물으면 늘 거짓말로 공연히 사람들을 번거럽게 하는 등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일이 매우 빈번하다보니 그 말이 부처님의 귀에도 들어갔고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그를 찾아갔습니다.
멀리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본 라훌라는 다가가서 그 의발(衣鉢)을 받고 물을 떠와서 부처님의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라훌라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너는 이 발 씻은 물을 마실 수 있겠느냐?”
“마실 수 없습니다. 이 물은 원래 맑고 깨끗하던 것이지만 이제 발을 씻어서 더러워졌으므로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 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너도 그와 마찬가지다. 내 아들인 왕손(王孫)으로 태어나 속세의 영화(榮華)를 버리고 사문(沙門)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정진해서 몸을 닦고 입을 지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삼독(三毒)의 더러움이 네 마음속에 가득하니 마치 이 더러워진 물과 같아 다시 쓸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그 물을 버리게 하고 말씀하기를,
“너는 이 그릇에 음식을 담을 수 있느냐?”
“아닙니다. 그릇이 벌써 깨끗하지 않은 물 때문에 더럽혀졌으므로 음식을 담기에 알맞지 않습니다.”
“너도 또 그와 같으니라. 사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입에 성실함이 없고 마음에 정진함이 없으면 마치 더럽혀진 그릇과 같다.”
부처님은 발로 그 대야를 툭 찼습니다. 그러자 그 대야는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멎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라훌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그릇이 깨어질까 걱정이 되느냐?”
“발 씻는 그릇은 그 값이 매우 쌉니다. 마음속에 아까운 마음은 있을지 몰라도 깨지는 것을 그렇게 안타까이 염려하지는 않습니다.”
부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설사 사문의 몸이라 하더라도,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지 않고 쓸데없이 거짓말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을 행한다면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혜 있는 사람도 이 사람을 아끼지 않으니 마치 이 그릇이 땅에 떨어져 굴러가다가 깨뜨려지고 말 듯 버려지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미혹의 세계들을 전전(轉轉)하는 그 고뇌야말로 한이 없을 것이다.”
만약 내가 깨뜨린 그릇이 값비싼 것이었다면 그렇게 무심하게 다루었을까요? 제게도 소중하게 여기는 그릇이 있습니다. 그 그릇은 꼭 필요한 자리가 아니면 잘 쓰지 않습니다. 장 한 쪽에 소중하게 모셔둘 뿐 아니라 혹시 쓰게 되더라도 아주 조심스레 다루게 됩니다.
나는 어떤 그릇일까요? 내가 그릇이라면 내 주변사람들에게 어떻게 쓰이고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모양만 그럴 듯하다고 모셔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래 쓰다보면 정이 들고 손에 익어서 귀하게 여겨지는 것도 있고 비싼 돈을 들여 샀다고 하더라도 쓰임새가 맞지 않으면 장에 모셔진다하더라도 구석에 방치되기도 합니다.
자주 쓴다하더라도 아끼는 그릇이 있는가하면 모셔두듯 장에 들어있다고 하더라도 잊혀지기도 합니다. 나는 모셔지는 그릇이기보다는 쓰이는 그릇이기를 바랍니다. 나를 가까이 두고 쓰되 함부로 쓰이기는 바라지 않습니다. 늘 가까이 두되 아끼고 정성스레 쓰는 그릇이기를 바랍니다.
그릇을 깨뜨려 놓고 내 손에 와서 그동안 일하느라 애썼다는 마음이 아니라 저 유리조각을 어떻게 치울까 염려하는 마음 앞에서 나를 대할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귀한 그릇은 아니었지만 늘 곁에 두고 미덥게 써왔는데 그런 마음을 먹다니요.
그릇의 싸고 비쌈의 문제보다 그 그릇을 가격의 기준으로 대한 저를 돌아봅니다.
그릇이 내 손에 들어오기 전에는 가격이 있었겠지만 내가 쓰는 동안에는 그릇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그 가치였을 것입니다. 가격과 같이 그릇을 대한 나의 마음은 결국 세상의 기준과 다를 바 없었던 것입니다.
지난 해, 새해가 무엇이 다를까요? 그런데도 구태여 구분하는 것은 몸가짐과 마음먹기를 고쳐 부처님께 발원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부처님께 엎드려 내가 못하는 것을 대신해주십사 비는 것은 불자의 올바른 도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새해에는 곁에 있는 모든 것을 아끼고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켜가도록 하겠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넘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는 그릇이 될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나와 인연을 맺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나를 도와주는 그 보살핌을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늘 기쁜 마을 0701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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