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나는 부처다

일체유심조

무설자 2007. 4. 5.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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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물에 비쳐 보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달과 물에 비친 달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하늘에 있는 달은 ‘달이다 달이 아니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물에 비친 달은 달을 보지 못한 이에게는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말해 집니다.

 

존재 그 자체와 말해지는 것의 차이, 이것이 바로 법과 법 아닌 것의 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원효스님이 비몽사몽간에 마신 청량수가 해골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이었음을 알고 난 뒤에 하신 말씀의 ‘일체유심조’가 어떤 의미일까요?

 

혹자는 유심론에 치우친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냐 아니냐의 논의와는 별개로 보고 싶습니다.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나의 올바른 삶을 열어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존재 그 자체와는 별도로 각자의 색안경을 끼고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똑같은 음악을 듣고도 듣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상태로 받아들여야 옳다는 기준은 없습니다.

 

그림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추상화를 설명을 하려고 한다면 보는 사람마다 그 관점이 다를 것입니다. 다만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설명이 될 뿐 일 것입니다. 화가가 그 그림을 그릴 때의 마음과 보는 이의 마음이 일치될 수는 없습니다. 그린 이는 그렇게 그렸고 보는 이는 자신의 보는 관점에서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이 그림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된다고 한다는 기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나로 정의할 수 있는 기준은 합의에 의해 이해를 구할 뿐입니다. 그 합의는 시시각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변화되는 상황은 그 합의점을 바꿔 놓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합의에 모두가 공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에서 진리라고 하는 법이란 존재 그 자체라고 정의합니다. 존재를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중생의 상태이지요. 부처님은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신 분입니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가장 자연스럽게 사신 분이지요. 그래서 부처님이 설하신 법이란 과거에도 존재했고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며 지금도 존재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원효스님이 마신 밤중의 청량수나 아침에 본 썩은 물은 존재 그 자체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그때의 마음이 다르게 만들었을 뿐이지요. 그래서 일체유심조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을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별개라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마음이 분별해 내는 세상, 그것은 존재 그 자체와는 별도로 내가 만들어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공부한다는 것은 가능한 존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길을 찾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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