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말 없는 말

수선화, 존재 그 자체로 피어나라

무설자 2007. 3. 31. 13:30
728x90
 아파트 앞뜰에 노랗게 피어있던 수선화가 사라졌습니다. 다른 풀들은 게으름을 부리느라 아직 땅위로 제 모습을 보이지 않는데도 출근길을 배웅하듯 핀 수선화를 보는 게 좋았습니다. 그 수선화는 몇 년 전 우리 집 발코니에서 꽃을 피운 후 그 자리에 제가 옮겨 심었던 녀석입니다.

 

화분을 벗어나 땅에 뿌리를 내리느라 작년까지도 꽃이 시원찮았는데 올해는 제법 볼만한 모습이더니  손을 탄 모양입니다. 어느 집 발코니로 옮겨져 갔을까요? 아마 제 뿐 아니라 아직 바람이 찬 아침 출근길에 그 수선화를 보던 많은 사람들이 섭섭해 하고 있을 겁니다. 이른 봄, 아파트 화단에는 처음 핀 꽃이라 눈을 주던 모든 사람이 가졌던 행복을 한 사람의 욕심이 거둬가고 말았습니다. 


 

 

더운 여름 그늘도, 물도 없는 꽤 먼 길을 걸어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진맥진하여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일행은 맑은 물이 흐르는 내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옷을 벗을 생각도 못하고 물로 뛰어들었습니다. 어떤 이는 아예 물에 드러눕고 서로 물장구를 치기도 하며 머리를 박고 물을 한없이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은 그들이 들어가 있는 자리를 거슬러 올라가서는 손을 모아 물을 떠 먹고는 빈 물통에 물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씻고 근처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가만히 앉아 물 안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한 사람이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토록 더운 길을 우리와 함께 걸어왔는데 왜 우리처럼 물에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 질문에 빙그레 웃고 말던 그 사람은 하도 졸라대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도 평생 쓸 수 있는 양을 한정해서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내가 쓸 수 있는 양을 가늠해서 그만큼만 물을 쓴 것이지요.”   


 

내 것이라고 여길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그렇게 내 것이라 여기는 것을 어떤 마음으로 취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남의 것을 빼앗듯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것이라 만들지만 정말 내 것이 있을까요?

 

모든 것은 인연이 닿아 내게로 와서 그만큼만 머물다 가는 것을 억지로 내게로 오게 할 수는 있겠지만 영원히 머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취할 수 있는 양이나 내게 머물 수 있는 시간, 그 어떤 것도 내 욕심대로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 양이나 시간 또한 알 수 없는데도 가능한 많은 양을 영원히 내 것으로 가지려고 하는데서 다툼과 번뇌가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오로지 물질의 많고 적음으로 지위가 높낮이가 정해지고 행복도 그러할 것이라 여기는 듯 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현대인의 대부분의 고통은 내 것에 대한 그릇된 판단 때문일 것인데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은 겨울은 지났다지만 봄도 익지 않았으나 곧 온 세상이 꽃으로 가득해지면 굳이 봄이라 이를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그 봄을 누리며 오래 잡아두려 하지만 흐드러지게 핀 꽃이 지면서 봄도 속절없이 끝이 나 버립니다.

 

아파트 앞뜰에 피어있다 화분에 옮겨간 수선화를 발코니에 두고 보더라도 곧 꽃은 떨어지고 잎마저 마르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그 꽃이 진  화분은 어떻게 될까요. 필경 발코니 한 쪽에 있다 버려지듯 방치될 것입니다. 꽃이 핀 수선화는 모두가 가지고 싶은 것이었겠지만 꽃도 잎도 진 상태에서는 버려야 할 존재가 되고 말겠지요.

 

뜰에 핀 수선화 그 자체로는 귀하거나 천하거나 할 것이 없는데 발코니에 옮겨져 있으면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때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어 버립니다. 사람들이 구하는 대부분이 그럴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모든 것을 존재 그 자체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인연이 닿는 이에게 다가와 머물렀다  때가 익으면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년에는 수선화가 다시 뜰로 돌아와 어떤 사람에게도 속하지 않는 존재 그 자체로 다시 피어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뜰에 자라나는 여러 풀처럼 그저 싹으로 나서 잎을 키우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다시 땅 속에서 겨울을 나는 그런 존재 자체가 되길 바랍니다.

 

내 것이라 이름 짓지 않으면 물질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훌륭한 수단이 됩니다. 내 것이라는 욕심으로 소유하는 사람들에 의해 물질은 흐르지 못하고 정체되어 썩고 맙니다. 모두가 함께 쓸 수 있도록 내 것이라 한정짓지 않고 나누기 위해 잠시 내게 머물게 한다는 무소유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삶은 그 자체가 바로 행복일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이 봄을 이끄는 꽃처럼 그렇게 환한 삶으로 피어나소서.

 

송광사 부산분원 관음사 사보 '늘 기쁜 마을' 0703월호 게재

'사는 이야기 > 말 없는 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싸우는 삶, 받아들이는 삶  (0) 2007.07.18
[스크랩] 화살 같은 말과 향기로운 말  (0) 2007.05.09
은근하게 차를 마시니  (0) 2006.11.20
秋情雜談  (0) 2006.09.06
샘터 이야기  (0) 2006.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