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세상 이야기

배추이야기

무설자 2005. 12. 4.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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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들녘이 맨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직 수확을 끝내지 않은 배추밭이 드문드문 보입니다. 풍년가가 울려 퍼져야 할 가을이 지났지만 올해 들판은 우울함이 묻어날 뿐입니다. 쌀 시장 개방으로 농촌은 그 시름이 한층 깊어갑니다.

 

김장철이라 들녘을 가로지르는 길가에는 곳곳에 배추를 파는 전이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 배추로 김장을 담가 먹기 위해 직접 산지에서 배추를 사려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중국에서 그렇게 많은 김치가 들어오는 지를 이번 김치파동을 통해 알았습니다.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요일 늦은 잠을 줄여 길을 나선 건 우리도 김장에 필요한 배추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작년에도 농사를 지어 나누어준 분이 올해도 그렇게 해 주셔서 고맙게 받아 왔습니다. 밭에 도착하니 배추 겉잎까지 다 떼어 놓아 가져다가 바로 김장을 담구면 되겠습니다. 사무실을 같이 하고 있는 장 건축사의 어르신이 그 고마운 분입니다. 소일삼아 지으시는 밭농사의 수확물을 오늘 배추 외에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깻잎, 풋고추, 부추, 상추, 무, 알타리무, 겨울초, 토마토를 부를 때마다 가서 냉큼냉큼 받아왔습니다. 빈손으로 갈 수 없어 들고 가는 것이 음료수가 고작입니다. 아내가 표시 나는 선물을 하나 해야겠다고 벼르지만 어르신의 정성에 맞출 것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물이라는 것을 값에 비기면 찾기가 쉽지만 정성으로 마련하려면 쉽지 않지요. 아마 어려운 분에게 드릴 정성을 더한 선물을 준비해 보신 분들은 그 고민을 알 것입니다.


 

전주에는 이십여 년 전에 큰 은혜를 입었던 분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버님이 큰 병을 얻었을 때 내가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귀한 약을 어렵사리 구해주신 분입니다. 그 때 경황 중이라 고맙다는 인사도 변변하게 하지 못하고 기껏 연말이면 연하장을 보내는 정도로 그쳤습니다.

 

그것도 못 보낸 지가 십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내게 그 때 지은 집에 대한 자문을 받을 일이 있다며 몇 사람을 돌아서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연락을 하신 것이랍니다. 연락을 끊고 산다며 나무라십니다.

 

이렇게 내가 받은 은혜를 갚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오히려 내게 베푸신 분이 찾아 주시니 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형보다 나은 아우가 없다고 하는 얘기를 하신 모양입니다. 윗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준다는 마음조차 잊고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조그만 걸 나누고는 그 대가를 바라는 마음을 지울 줄 모르고 언제나 돌려 받을까하고 기다리는 것이 보통 사람입니다. 받는 데는 익숙하지만 나누어 주거나 받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조차 내지 못하고 삽니다. 그 삭막한 마음만 가득한 세상에서 이런 귀한 분들이 내 주변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복인지요.

 

보시布施라는 말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느낍니다. 준다는 마음 없이 나누는 것을 보시라고 하지만 그 의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늘 보시를 배우면서도 그대로 행하지 못하고 준다는 마음을 담아 나누고는 돌려받을 욕심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고 삽니다.


 

한 해의 끝에 서면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서 정리해야 될 것들이 많습니다. 연초의 계획과 지금의 결과를 비교해보며 왜 그대로 진행되지 않았던가를 살펴야 합니다. 계획에는 없던 여러 가지 일도 있었습니다. 그 일들의 원인에 내가 제일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르지 못한 결과에 세상을 탓하고 좋은 결실에는 자신의 공과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잘못은 자신의 탓이며 잘된 점은 대부분 주변의 도움이 가장 큰 원인이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내게 나누어 주는 분이 없다면 아무런 결과도 만들 수 없는데 조그만 결과에다 나의 알량한 재주 때문이라며 자랑 삼는 게 아직 제 모습입니다. 조그만 걸 나누고는 그 자랑을 이곳저곳에 자랑삼는 그 정도를 아직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집에다 가져온 것을 풀어 놓으니 우리 집에서 먹을 량으로는 너무 많습니다. 아마 아내는 김장을 정성스럽게 담가서 이 집 저 집 나누어 줄 것입니다.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누군가 내게 베풀어 준 것을 갚는 것이기도 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받는 만큼 그분에게 다시 되돌려 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분에게 나누어 줌으로서 내게 나누어 준 그 분의 마음도 함께 나누는 것 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가장 좋은 도반이자 스승이 아내임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아직 몸으로 행하는 것보다는 말이나 생각으로 마음먹은 것을 대신합니다. 하지만 아내는 자신의 생각을 대부분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올 한해 거의 빠지지 않고 행하는 호스피스 봉사활동도 그렇고 이렇게 김장을 담가 나누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제는 같이 살면서 보는 것이 바로 공부입니다.

 

언제쯤 나는 말이나 생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실천을 통해 많은 이들과 함께 하게 될까요? 다행히 이렇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스승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나이를 먹으면서 얻는 작은 소득인가 봅니다. 올해도 제게 베풀어 주신 많은 분들께 큰 절을 올리면서 새해에는 그 분들처럼 행할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