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말 없는 말

복을 부르는 이름

무설자 2005. 9. 13.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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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호적에 올린 이름 말고 두 가지의 이름이 더 있습니다.

원성圓成이라는 법명과 제가 스스로 지은 무설자無說子라는 아호(?)입니다.


법명은 1975년,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지금은 열반하신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스님께 5계를 받으면서 받았습니다. 그 때 스님께서는 ‘둥글둥글하게 다 이루어라’라고 하시면서 계첩을 내려 주셨습니다.

저는 원래 타고난 성품이 매우 날카로웠습니다. 얼굴도 급한 성격처럼 뾰족하면서 몸도 아주 깡마른 모습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그걸 아시는 듯 이런 이름을 주셨습니다.

제 호적상의 이름은 바를 정正에 너그러울 관寬을 씁니다. 바르게 살려고는 하였으나 너그럽지는 못한 편이었죠. 타고난 성품을 바꾸기는 어려웠으나 법명에 맞추어 살기 위해서 둥글둥글해지려고 애는 많이 쓴 것 같습니다.

지금은 칼집에 숨긴 칼처럼 천성을 잘 숨기면서 꼭 필요할 때 꺼내 쓰려고 법명을 칼집삼아 살고 있답니다. 필요할 때만 칼을 써야하는데 아직도 불쑥불쑥 칼이 나오니 법명을 잘 건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호는 10여 년 전에 스스로 지었답니다. 달변이나 눌변도 아니면서 괜히 말만 많이 하는 것 같아서 말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고 말없는 말을 하자는 생각이었죠. 무설자無說子, 말로만 끝나는 말이 아니라 제대로 된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죠.

이름이란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가장 큰 이미지입니다. 함축된 어떤 것, 그것이 이름이죠. 그래서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요? 남길 수 있는 이름을 가졌던 성현들은 이름만으로도 그분을 떠올리게 합니다.

무설로서 설을 능가해야 하는데 아직 잡설에 불과한 말을 하고 사니 참 많은 공부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호적에 있는 이름에서는 너그러움을 갖추어야 할 것이고, 법명에서는 부드러움을 통해 이루어야할 것이니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지은 아호에서는 자신을 잘 알고 고쳐야 할 것을 발원하였으니 몇 번의 생각을 통해 한 마디를 뱉어야 할 것입니다.

법정스님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웅변은 소음에 불과하다 하였습니다. 성경구절에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한 구절은 스님께서는 말씀 전에 침묵이 있었고 그 다음에 말씀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침묵이 우선하는 말을 하는 이, 그것이 무설자라는 제 아호의 정학한 설명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이름이란 남이 불러서 좋은 것이 되기도 해야겠지만 스스로 이름에 부끄럽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이름이 길흉화복을 좌우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이름이라도 그 이름을 좋은 의미로 남이 불러 주어야 할 것입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지었으나 그 이름은 이미 남이 내가 필요할 때 부를 것이므로 좋은 일에 불러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법명이란 불제자로서 불려지는 이름이므로 부처님과 그 가르침과 승가에 누가 되지 않도록 불려져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아호를 짓는다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름으로 짓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처럼 이름이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름에 책임을 지는 삶이었으면 합니다. 어차피 다른 이가 내 이름을 부를 것이므로 좋은 뜻으로 부를 수 있는 행동을 한다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복이 차곡차곡 쌓이게 될 것입니다.


이름이 복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복을 짓는 삶을 살아가노라면 그 이름이 바로 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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