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말 없는 말

여름의 한 쪽을 지나가면서

무설자 2005. 8. 28.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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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익은 여름 햇살은 풍요롭다. 차 창 밖으로 펼쳐지는 논밭과 낮으막한 구릉의 나무들은 쏟아지는 하늘의 축복을 맘껏 받아들이고 있다. 때 맞춰  내린 지난 비로 작물들이 쑥쑥 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안동으로 향하는 차가 재를 넘자 눈 앞에는 무리져 핀 자극적인 꽃무리의 풍경이 펼쳐진다. 산과 들에는 초록 색만 가득한데 웬 꽃일까? 가까이에서 보니 화훼농가에서 조성한 꽃 농장이었다. 하지만 김해지역에서 보여지는 전문화훼단지 풍경이 아니라 들녁의 한쪽에 꽃을 심었을 뿐이다.

 

이미 활짝 핀 꽃들로 색색으로 눈부신 모양새를 보니 이미 꽃을 내다 팔기에는 상품성이 없어보였다. 꽃을 상품으로 팔기 위해서는 봉오리가 맺혀있는 상태에서 내다 팔아야 하는데 말이다. 어쨋든 지나가는 여행자의 눈은 그 꽃 덕분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지천으로 피는 들꽃은 꺾여져서 화병에 꽂히기 위해 제 모양과 색을 뽐내듯 피지 않는다. 때가 되면 그 때에 맞춰 온 산야에 피어서 자연이라는 큰 그림을 만든다. 하지만 사람이 키우는 꽃이라면 상품이라는 용처에 쓰여질 뿐이니 그 꽃들의 온전한 삶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제대로 피기도 전에 꺾여버리고 만다.

 

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의 처지도 이와 다름 아닐 것이다. 누구나 고귀한 인격체로 태어났지만 그 자체로 지닌 쓰임새를 제대로 발휘하고 살기는 너무나 어렵다. 만개한 채로 그 사용할 곳을 찾지 못해 한 쪽에서 홀로 지고말 재배한 그 꽃의 처지와 같은 이가 얼마나 많은가?

 

설령 제대로 쓰여질 곳을 찾아 취업을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쓰여지다가 유효기간이 끝나버리면 용도 폐기가 되기도 한다. 마치 꽃꽂이 된 꽃이 일정 기간이 지나 버리면 쓰레기 통에 버려지듯이. 매일 도시의 곳곳에 화려한 꿏이 공급되지만 그만큼의 량은 또다른 곳으로 버려진다. 유효기간만큼 필요할 뿐이다. 결혼식에는 하루, 장례식에는 사흘인 것처럼 그 유효기간만 다를 뿐이다.

 

 

깊은 산에는 철에 맞춰 피고 지는 꽃으로 그 아름다움이 달라진다. 초봄의 흐드러지듯 피는 진달래, 철쭉에, 봄이 무르익으면 피는 오얏꽃 등 과실나무 꽃에다 벚꽃까지 그야말로 꽃천지다. 여름에는 온통 녹음이 가득한데 군데 군데 피는 꽃들이 악센트가 되어 그림을 만들어 준다. 가을이면 들국화와 억새, 단풍이 만드는 그림은 또 어떤가?

 

아무도 보여주기 위해 피지는 않지만 이보다 완전한 그림이 있을까? 하나하나가 제 나름의 모습만 준비하면 저절로 조화로와 지는 것이다. 보여주기 위해 준비하며 사는 인생은 서글프다. 조화롭지도 못하고 아름답지도 않다. 그냥 화려한 색상과 디자인이라고 하는 억지 그림처럼, 어떤 필요에 알맞게 쓰여지는 모습의 시한부로 존재한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세상에 쓰여지기 위한 준비만 하다가 청춘을보내고 만 것 같은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던 때가 있었다.

 

누구에게 쓰여지고 또 버려지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고있지만 아직 만족함이 없으니 진인사대천명을 중얼거릴 때가 많은 것 같다. 지난 삶의 결과가 지금이라면 지금 하는 일이 바로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기에 그저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일하는 것 뿐이다. (200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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