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흔이 다 된 지인과 점심을 먹었는데 자식에 대해 푸념과 함께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네 가족의 현실이 심각한 정도를 넘어 위기에 봉착했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그분은 슬하에 삼남일녀를 두었는데 다 출가를 시켰는데 아직 손주를 하나도 보지 못하고 있다며 고개를 저었다. 옆에 앉아있던 분은 한술 더 뜨는 말로 마흔이 지난 딸 둘이 다 비혼주의라고 한다.
이 두 분만 해당되는 이야기라면 위로하는 말로 그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식들의 결혼과 손주를 포기하고 있다는 분이 적지 않으니 우리나라의 가정이 무너지고 있는 게 아닌가? 노총각, 노처녀라는 말이 아직 사전에 남아 있지만 머지않아 사어死語가 되지 않을까 싶다. 결혼 적령기라는 말 자체가 의미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결혼 여부를 묻는 게 큰 실례가 된 세상에 살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브런치스토리 페르세우스 작가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가정을 이루고 부모가 되겠다고 결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라고 결혼과 출산에 대해 이야기한다.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로 이보다 더 명약관화한 말이 또 있을까 싶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미래의 가정을 꿈꿀 수 있을까? 또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아이를 가지려는 마음을 낸다는 건 정말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결혼하지 않는 이유가 한 개인이 가지는 사정이라면 국가가 염려할 사항이 아니다. 그렇지만 사회 전체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나라님이 나선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을지 미지수이다. 그런데다 개인적인 행복과 관련시켜 결혼이나 출산을 결정한다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어떻게 찾아야 할까?
지금 우리나라에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지 알 수 있는 지표는 자살률이다. 부끄럽게도 자살률에서는 부동의 세계 1위를 지키고 있으니 더 다른 말이 필요할까? 사는 게 죽는 것보다 힘들어서 자살을 선택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지옥과 다름없다는 것일까? 세계 10위 경제 대국, 선진국 등 우리나라를 세계 으뜸이라고 하며 내세우는 국가 브랜드 순위와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반대로 가고 있다.
국민 개개인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데 나라가 선진국이나 경제대국이 되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일까? 물론 국가의 경쟁력은 국민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토대가 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국가경쟁력을 높이느라 국민의 행복을 돌보지 못했다면 지금부터는 그 어떤 정책보다 우선해서 자살률을 낮추고 출산율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 혼자의 삶이 아니라 가정을 이루어야만 얻을 수 있는 행복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대목이 있다. 행복은 가정을 중심으로 살아갈 때 얻어지며 반대로 가정생활에 소홀하면 불행하게 된다는 말이다. 가족 중심의 일상생활과 개인적인 일로 바쁜 삶은 그 결과가 반대로 나온다는 것이다.
혼자 사는 일인가구가 전체 가구 수의 30%를 넘어서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행복지수의 상관관계로 볼 수 있겠다. 아이들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부모에게서 독립해 사는 게 대부분이며 그 시기에 맞춰 부부가 각방을 쓰고 있는 집이 적지 않다. 이런 세태도 가정의 분위기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아이들이 우리집이라며 다니러 왔지만 제 방이 부모의 방으로 되어버린 집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가족과 함께 하는 가정의 일상을 더 소중히 여기는 집이라야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반대로 개인의 삶에 비중을 두고 살아간다면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해지는 게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가정이 붕괴되고 있는 건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가족을 배려하고 내 삶을 희생하면서 가정을 소중하게 여겨야 나의 행복도 보장될 수 있다.
가정이 지켜지는지 여부는 식구들과 함께 밥을 먹는가를 살펴보면 된다. 저녁까지 밥을 함께 먹는 게 어려우면 아침밥은 꼭 함께 먹어야 한다. 세끼 중에 한 번도 함께 먹지 않는 집에서 행복한 가정을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집에서 식구들과 밥을 함께 먹으면 배만 부른 게 아니라 마음까지 채워진다. 집에서 먹었던 엄마의 밥은 평생의 기억으로 그리움으로 남는데 자고 갈 방마저 없어진 아이들에게 집과 행복은 어떤 상관관계로 남아 있을까?
아파트에서도 얻을 수 있지만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행복
우리나라를 아파트 공화국이라고 한다. 대도시뿐 아니라 시골의 면 단위에도 새로 짓는 집은 다 아파트이다. 아파트는 어디에 있어도 문이 닫혀 있는 집이다. 현관문만 닫혀 있는 게 아니라 방문도 닫고 사는 집이 아파트이다.
사람이 집을 만들지만 나중에는 그 집이 사람을 만들어간다고 한다. 아파트라는 집은 문을 닫고 사니 이웃과도 그렇지만 가족들끼리도 관계가 닫히기 쉽다. 아파트에 살면서 현관문을 열어두고 사는 집을 본 적이 있는가? 단독주택에 살았던 시절에는 현관문은 잠자는 시간이라야 닫았고 우리 한옥에는 현관문 자체가 없었다.
아파트는 안방 위주로 설계된 집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중학생만 되어도 방이 좁아서 잠자는 시간에만 쓸 수 있게 된다. 대학생이 되면 집을 나가서 살아야 할 이유가 아파트는 우리 가족이 함께 사는데 불편한 집이기 때문이다. 부부만 남아 사는 집은 아이들이 떠나서 남아도는 방으로 각자 편하게 사는 게 좋다며 헤어져 살게 된다.
이미 국민집이 되어 버린 아파트를 탓하며 행복 운운하는 개 무슨 소용인가 싶기는 하다. 그렇지만 아파트에서 살더라도 우리 식구를 위한 쓰임새로 우리집만의 분위기로 쓸 수 있으면 식구들과의 삶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부부가 각방을 쓰더라도 작은방을 하나씩 쓰고 안방은 함께 쓸 수 있는 서재나 손님방으로 쓰는 건 어떨까? 거실을 서재 분위기로 만든다면 부부나 가족들의 다양한 일상생활이 이루어질 수 있다.
'어떤 집'으로 부동산 가치를 따져 집을 마련하고 집값이 오르면 옮겨 사는 게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생활이다. 재산 증식은 더 낫게 이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사는 집에 어떤 행복이 깃들 수 있을까? 아파트에서 살더라도 '어떻게 살 수 있는 집'으로 집을 구해본 적이 있는가? 만약에 아파트를 구한다면 밤이 되면 창에 불이 많이 켜지는 동네라면 길택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아파트를 떠나 단독주택을 지어 살고 싶다면 그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그 집은 우리집이니 우리 식구들이 행복해져야 한다는 게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 집에서 일상을 함께 지낼 식구는 물론이고 다니러 오는 가족이나 손님까지 편안하게 머물 수 있어야 하겠다. 행복은 오직 집에서, 함께 지내는 사람들과의 일상에서만 얻을 수 있기에 우리 식구들의 보금자리로 단독주택을 짓는다.
여성경제신문 '더봄' 연재-'단독주택인문학' 9
원문읽기 : https://www.woman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6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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