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 이야기/여성경제신문연재-무설자의 보이차 이야기

할아버지 차 주세요

무설자 2024. 7. 15.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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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를 다반사로 마시기를 권하는 글을 연재하게 되었으니 필자의 차 생활을 먼저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나의 일상은 하루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보이차와 함께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에는  따뜻한 보이차 숙차를 마시면서 경전을 필사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 시간에는 생차의 향을 음미하며 명상의 시간을 가지며 마무리된다.

    

나에게 보이차를 마시는 건 취미 삼아 어쩌다 하는 일이 아니라 다반사라는 말처럼 세끼 밥 챙겨 먹듯이 하는 일상이다. 집에서 쉬는 시간에도, 사무실에서 일하는 중에도 찻물 끓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차 마시며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대화를 나누고, 업무 시간에도 차와 함께 하고 있으니 내 시간은  빈틈없이 꽉 채워 보내는 셈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준 보이차     

 

보이차를 마시기 시작했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18 년 전, 내가 하는 일인 건축사사무소에 가장 큰 위기가 닥쳤던 2006년이다. 그 당시 정부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부동산과 건축경기가 바닥을 치다 보니 일 없이 보내야 하는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다. 그 무렵 우연히 보이차를 접하게 되었고 하루 종일 이 차 저 차를 바꿔 마시면서 힘든 마음을 추스르며 살았다.     

 

건축사라는 직업이 본업이지만 수필가로 등단할 정도로 글도 꾸준하게 써왔었다. 그래서 일이 없다고 우울해하거나 세상을 탓하지 않고 보이차를 마시며 글을 쓰기로 했다. 그동안 열심히 작업했던 내 작품을 돌아보며 글로 써서 블로그에 올렸다. 대중에게 공개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억지춘향으로 하는 일이었지만 내실을 다지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보이차를 마시느라 형식과 격식을 따로 차릴 필요는 없다. 찻주전자 하나만 있으면 그만으로 분위기를 만들고 싶은 그만큼 하면 된다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흘러가기 마련인데 글을 쓰다 보니 그 시간만큼 제목을 달리 한 결과물이 블로그에 쌓였다. 내가 작업했던 건축물이 글로 정리되어 채워진 블로그는 정보 검색을 통해 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되기도 해서 지금까지 수주에 적잖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 보이차를 마시면서 글을 쓰는 습관이 그때부터 시작되어 지금도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건축에 관한 글뿐 아니라 보이차 생활에 대한 글도 블로그에 1000 편이 넘게 올려져 있다. 보이차로 정보 검색을 해서 내 블로그를 찾은 사람이 건축에 대한 글도 접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일이 없다며 허송세월을 보낼 뻔했던 그때 만나게 되었던 보이차를 마시며 글을 쓰면서 나만의 경쟁력을 갖게 된 셈이다.     

 

지인들을 다우로 만든 보이차     

 

우리는 혈연, 지연, 학연으로 지내는 사람들과 얼마나 가까이 지내고 있을까? 혈연으로 엮인 가족친지라고 해도 전화통화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며 지내는 게 요즘이다. 부모자식이 한 집에 살아도 대화를 나눌 시간이 많지 않고 부부지간에도 마찬가지인 집이 많다. 그러니 친구나 선후배는 길흉사 자리에서나 만나는 게 보통이 아닌가?            

 

부부라고 해도, 부모자식도 함께 할 수 있는 매개체가 있어야 대화나 만남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밥을 먹는 자리를 만들고 술자리도 가지면서 가족애를 다지고 우의를 돈독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가? 그렇지만 그런 자리를 가지는 게 쉽지 않은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다우들과 한달에 한번 다연회라는 다회로 찻자리를 가진다. 성별 불문, 나이 불문, 직업 불문으로 보이차를 즐겨 마신다는 공감대만으로 만나는 자리이다

보이차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우리 가족은 물론이고 주변의 지인들에게 차 생활을 권해오고 있다. 건강을 유지하는데 좋다며 보이차를 권하니 열이면 대여섯은 차 생활을 받아들였다. 18년 간 꾸준히 해 온 보이차 생활을 전하다 보니 내 주변의 지인들은 거의 차를 마시게 되었다. 차를 마시게 된 사람들은 나와 다우가 되어 공감대를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다우라는 말처럼 차를 함께 마시는 벗으로 지내게 되니 통화는 물론이고 만남의 자리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다. 좋은 차가 있으니 차 한 잔 하러 오라는 말로도 자리가 만들어져서 차 이야기로 시작된 대화는 다른 주제로 이어지게 된다. 차 한 잔 하자며 만나게 되면 밥이나 술로 자리를 청하는 것보다 부담 없이 만들어진 자리지만 나누는 대화는 훨씬 정겹다.  

   

부부도, 자식도 벗으로 지내게 되는 보이차      

 

카페를 십년 간 운영했었던 아내는 커피 원두를 직접 볶았던 커피 전문가이다. 나는 커피도 좋아하는데 아내는 보이차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침마다 머그잔에 보이차를 담아 건네니 이젠 미리 컵을 챙겨주게 되었다. 남편이 정성을 다해 우려내는 차를 받아 마시는 아내는 틀림없이 밖에서 자랑삼아 이야기할 것이라 믿고 있다.

 

딸은 결혼 전에도 차를 좋아했지만 사위는 어떨까 싶었는데 다행히 주는대로 잘 받아 마셨다. 사위를 마음에 들어하는 장인 없다고 하지만 우리 사위와는 다우로 지내니 그냥 합격이다. 아직 스스로 차를 챙겨 마시지는 않지만 곧 팽주를 자처해 장인 다우에게 차를 건네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손주의 제안으로 찻잔을 맞대고 건배, 건배사는 손주가 하는데 언제나 '우리 가족 만세'라고 한다.

 

이제 네 돌이 되는 손주는 할아버지를 만나면 첫마디가 “할아버지 차 마실까요?”이다. 올해부터 유치원에 다니게 되어 친구 이야기며 선생님께 배운 걸 끝없이 종알댄다. 이보다 더 듣기 좋은 다담이 또 있을까? 우리 손주는 아마도 전생에 나와 다우로 지냈을 것임에 틀림 없을 것 같다.      

 

우리 가족은 아내가 차리는 밥상이 우선이지만 그 다음이 내가 차려내는 차상이다. 밥은 맛있게 먹는 게 우선이지만 차는 이야기를 나누는 게 더 종요하다. 그러니 우리 가족의 우애는 아내의 밥상보다 내 찻자리의 기여도가 높다고 주장하고 싶다.

 


     

마치 呪文주문처럼 사람을 청하는 말은 "차 한 잔 할까요?"일 것이다. 술이나 밥은 상대와 때를 가리게 되지만 차는 시도 때도 없이, 그 누구라는 상대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가족끼리도 밥 먹으려면 약속을 잡아야 하는 지금 세태에 차는 내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가교가 될 수 있다.    

 

보이차는 밥 먹듯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일상의 차이다. 숙차는 아이가 마셔도 괜찮고, 카페인 성분에 대한 부담이 적어서 밤에 마셔도 지장이 없는 데다 쌀값처럼 가격에서도 부담이 없다. 생차는 열 종류, 스무 종류를 두고 그날 분위기에 맞춰 골라 마시며 향미를 즐길 수 있다. 나는 오늘도 보이차를 마시며 아내와 손주까지 벗이 되는 소확행을 누리고 있다.

 

 

여성경제신문 '더봄' 연재 '무설자의 보이차 이야기' 2

 

 

무 설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