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이야기/행복한 삶을 담는 집 이야기

단독주택을 공부해보고 싶습니다

무설자 2024. 2. 2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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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가 되면 5학년이 되는 건축학과 학생이 두 달 동안 현장 실습을 마치고 실습 후기를 남겼다. 건축학과는 다른 전공과 다르게 한 학년을 더 배워 5학년을 마치고 졸업을 하게 된다. 건축학과는 건축설계를 주 전공으로 공부를 하는데 건축물을 설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면 5년을 배워야 하는 것일까?     

 

4학년을 마친 겨울방학은 학생 입장에서는 아주 소중한 시간이라 할 수 있다. 5학년이 되면 봄 학기에 졸업설계를 마치고 나면 취업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 취업을 앞두고 현장 실습을 해보는 건 진로를 선택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학생이 우리 사무소에 실습 의뢰를 하려고 한 의도가 의외였다. 4학년까지 배운 건축에 대한 마무리 공부로 단독주택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단독주택을 배울 수 있는 사무소를 검색해 보다가 자료를 읽어보고 의뢰서를 넣게 되었다고 했다.     

 

천자문 펜글씨 교본으로 두 달간 써서 필체를 교정했다며 손글씨로 쓴 실습 후기  

 

실습을 마치며     

 

2023년 12월 27일 첫 출근을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 달의 실습기간이 끝나 이렇게 후기를 작성하고 있으니 시원하면서도 섭섭한 감정이 올라옵니다.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첫 만남에서 건축사님이 제게 가진 느낌이 그렇게 좋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건축학과 4학년을 마친 제가 김수근, 김중업 그리고 승효상이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건축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였으니까요.    

  

그리고 글씨체마저 엉망이었으니 마치 종합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환자처럼 비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날 저는 건축사님과의 첫 만남에서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추천해 주신 천자문 교본 쓰기를 바로 구매했습니다. 실습 기간 동안 부지런히 써서 마지막 페이지를 채우고 나니 저의 글씨체가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습니다.      

 

누군가는 글씨체 교정이 별 것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게는 그 의미가 남달랐습니다. 언젠가 손글씨를 써야 할 일이 생겼을 때 제 글씨체가 좋지 않아서 일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제 글씨체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교정할 수 있게 도와주신 건 어쩌면 제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습을 시작하면서 건축사님께서 인문학에 대해 강조하시던 부분이 처음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인문학은 문과적인 부분인데 어째서 건축 설계와 연관된다는 것인지 그때는 선뜻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실습을 마친 지금은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인문학은 곧 사람이 살아온 오랜 시간 동안 있었던 문학, 역사 그리고 철학을 담은 학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인문학은 사람이 삶을 지속해 오면서 고찰되었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으니 무엇보다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는 답안지 같은 것이죠. 그것을 이해하고 난 이후부터 건축사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제 마음속 깊이 전해졌습니다. 시대가 발전하고 세태가 변해도 우리는 결국 모두 동일한 ‘인간’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맞는 보편성을 찾게 된다는 것을요.   

  

삼대가 같이 사는 집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며 아파트가 가진 문제점을 말해주실 때에도 저는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아파트가 우리 가족의 행복을 앗아간다고 하시니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아파트의 정형화된 평면과 ‘손님’이라는 키워드의 부재를 깨닫고 난 이후부터 이런 점들이 가족을 담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당연히 행복해질 수 없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면 자식과 손주를 두게 될 것입니다. 우리 부부를 찾아올 손주라는 귀한 손님이 우리집에 지내기가 불편해서 잘 오지 못하게 된다면 그만큼 불행한 삶이 또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태껏 설계를 공부해 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디자인이 아니라 평면 얼개를 어떻게 짜야하는가의 고민이었습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부분이 어떤 공간을 어떤 영역에 배치해야 하며, 공간 구성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었죠. 겉으로 드러나는 디자인에 집중하다 보니 외관에 맞춰 평면을 구성하며 설계 작업을 해왔습니다.      

 

건축사님과 주택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각 공간이 필요로 하는 조건과 외부 공간이 연계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셔서 지금은 어떤 설계를 하더라도 두렵지 않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대학교에서 4년을 공부하면서 풀지 못했던 고민이 실습 기간 두 달로 해소되었으니 제게는 얼마나 값진 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건축사님께서 ‘인복이 많은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라는 말씀을 되새겨 보았을 때 어쩌면 그 행복한 사람이 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금 건축사님께 드릴 게 없는데 오랜 시간을 두고 쌓아오신 소중한 건축의 이치를 아낌없이 가르쳐주시니 너무나 고맙습니다.    

 

나의 단독주택 근작 3제-심한재, 지산심한, 석경수헌-도반건축사사무소
 

 실습 기간에 대한 성과물로 건축사님의 단독주택 최근 작품 3제-지산심한, 석경수헌, 심한재의 분석과 도면 작업과 모델링, 하동 두 마당 집을 제 작업으로 마무리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하동 두마당집을 건축사님께 배운 단독주택에 대한 이모저모를 적용하여 익힌 바를 결과물로 정리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제가 다른 건축사님을 만나서 실습을 했다면 이 정도의 성과와 배움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에게 주신 가르침에 감사드리며 실습 후에도 건축사님과의 인연을 이어가며 실력 있는 건축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짧은 두 달 동안 많은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임지호 올림     

 

학생이 실습 성과물로 작업한 하동 주택

 

 


 

이 학생은 요즘 젊은이로는 보기 드문 인성과 배움에 대한 열정을 갖춘 친구였다. 흰 종이에 색을 묻히는 대로 드러나듯이 내 얘기를 잘 받아들여서 오전과 오후 한 시간가량 매일 스터디를 했다. 졸업을 앞두고 실무를 경험하면서 단독주택으로 공부를 해보고 싶다며 실습을 신청했던 의욕만큼 결과에도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프로젝트 중에서 가장 어렵다고 할 수 있는 단독주택은 거의 모든 건축가들의 데뷔작이 되기도 한다. 나 역시 건축사를 취득하고 첫 작업이 단독주택-관해헌 1994년-이었고 가장 애착이 가는 작업이었다. 실무 40년, 건축사 취득 후 30년이 된 지금 단독주택으로 후반기 건축 인생을 회향하고 있다.    

 

나의 단독주택 작업을 보고 찾아와 배움을 청했던 기특한 학생, 실습 후기를 읽으며 안도감을 느꼈다. 배우려고 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모습이 또 있을까? 학교에서 얻기 어려운 실무 환경의 분위기를 익혔으니 마지막 학년을 잘 마무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