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이야기/사찰건축을 위한 제언

[스크랩] 절을 바꾸어야 불교가 산다, 바람직한 도심사찰의 모습은

무설자 2017. 10. 1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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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을 바꾸어야 불교가 산다, 바람직한 도심사찰의 모습은

 

 

한 때 광고에서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문구가 있었다. 요즘도 유효하다고 본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전문분야가 있다는 것이다. 전문분야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합리적임을 말한다. 그럼에도 비전문가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면 어떤 위험이 닥칠지 알 수 없다.

 

시시콜콜 간여하는 스님

 

박호석법사 칼럼에서 의미 있는 글을 보았다. 군포교에 올인하고 있는 박법사는 최근 비전문가가 전문가인 처럼 하는 행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서울 근교의 한 사찰에서 스무 평 남짓한 요사를 신축할 때 지켜본 일입니다.
 
주지스님이 건축자재를 구입한다고 혼자서 목재소를 다닙니다. 목재를 잘 아는 신도나 시공자에게 맡기면 될 일을 무엇이 그리 못 미더운지, 전문가도 아닌 당신이 직접 나섭니다. 결국 좋은 목재를 값싸게 구매했는지는 고사하고, 수요예측을 못해 남은 목재가 담장 뒤편에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중장비와 고급기술이 필요한 자연석 쌓기 축대공사를 하면서 뜨락이 넓으니 좁으니 하더니만 쌓은 축대를 헐고 다시 쌓기를 수차례 반복하더니, 결국 건축비가 배가 더 들었다고 합니다

 

 

(박호석법사, 스님들은 수행과 전법에만”, 미디어붓다 2015-07-22)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사찰순례를 다니다 보면 건축자재가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찰경내 풍경을 보면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네모난 콘크리트 건물은 팔작지붕형태의 대웅전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지스님의 의욕이 너무 앞선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건축에 대하여 전문가도 아님에도 일일이 간여 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전 대통령의 화법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해 봐서 아는데…”로 시작 되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시시콜콜한 것까지 관여한다. 주사가 해야 할 일을 장관이 하는 것과 같다. 그럴 경우 장관이 아니라 주사라 불러야 할 것이다. 건축에 대하여 모르는 스님이 일일이 간여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래서 박호석법사는 도면도 볼 줄 모르는 비전문가의 어설픈 열정이 삼보정재(三寶淨財)를 낭비하고, 공기(工期)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라 하였다.

 

거대한 교회 건물을 보면

 

도시에서 사찰구경하기가 힘들다. 도시에서 교회와 성당은 넘쳐 나지만 사찰은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보일등말등하다. 이럴 때 거대한 교회 건물을 보면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착잡하기도 하다.

 

지나가는 길에 거대한 교회를 보았다. 그 규모와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한참 유심히 쳐다 보았다. 중앙에는 돔이 있어서 마치 장충체육관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돔형으로 된 것은 중앙에 무대가 있고 객석이 있는 극장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거대한 교회는 극장식으로 되어 있다.

 

 

 

 

 

 

도시에는 크고 작은 교회를 무수하게 볼 수 있다. 특히 거대한 교회건물을 볼 때 마다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하여 절망한다. 저렇게 커다란 교회가 세워질 때 까지 한국불교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어느 종교기자 말처럼 우리 불교계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 하다 .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낮잠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는 사이에 도시는 온통 교회천지가 되었다.

 

심산유곡에 대궐 같은 절이

 

산에 가면 대궐 같은 절을 볼 수 있다. 언젠가 경북의 어느 절에 단체로 순례 갔었다. 심산유곡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절을 볼 수 있었다. 특히 경복궁이나 창덕궁을 연상시키는 전각을 보면서 마치 대궐을 옮겨 놓은 듯 했다.

 

 

 

 

 

 

그러나 깊은 산중에 있어서 일반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다. 대궐 같은 절에 사람 보기가 힘들었다. 이런 절이 도심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3층 짜리 단독주택이 여법한 가람으로

 

도시에서도 산사에서 보는 것처럼 팔작지붕형태의 전각을 볼 수 있을까? 가능하지 않다. 전통사찰이 아닌 한 일반주거지역에서 전통사찰 형태의 절을 짓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지붕이 있는 절을 볼 수 있다.

 

사는 지역에 절이 하나 있다. 거의 십년 전에는 단독주택에 불과 하였다. 산비탈에 있는 3층 구조의 단독주택이었다. 그럼에도 절로 활용하고 있었다. 어느 해인가 공사가 시작 되었다. 지붕을 만든 것이다. 평평한 콘크리트 옥상에 팔작지붕형태의 지붕이 만들어진 것이다. 완성되고 나니 산사에서 보는 듯한 여법한 가람으로 변모 하였다. 또 몇 해가 지난 후 이번 봄에는 일주문공사가 시작 되었다. 주택에서 볼 수 있는 대문을 허물고 단청이 되어 있는 대문을 만들고자 함이다.  

 

 

 

 

 

 

3층 짜리 단독주택이 여법한 가람으로 변모하였다. 참으로 극적인 변신이다. 이렇게 지붕을 올리고 일주문을 건립하면 전통사찰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절 같이 보인다. 처음 본 사람들에게는 이전에 3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절을 바꾸어야 불교가 산다

 

단독주택에서 팔작지붕만 얹으면 절로 보인다. 그런데 콘테이너 하우스에 지붕을 얹고 단청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형태도 여법한 절이라 볼 수 있을까? 절 건물은 반드시 지붕을 얹고 단청을 해야 만 할까? 이와 같은 방식에 의문을 표하는 건축사가 있다. 무설자님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개신교의 경우 아무리 작은 교회일지라도 교육하는 공간을 꼭 만듭니다. 일주일이면 하루 이상 교회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새벽예배를 비롯하여 휴일예배는 꼭 참석할 뿐 아니라 어린이부터 청소년, 청년부, 장년부 등 연령대에 맞는 모임을 만들어 예배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집에서도 식사할 때 하는 기도부터 좋은 일, 나쁜 일을 막론하고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그 모든 근거를 성경에 있으며 성경의 구절대로 생각하고 실천하려 합니다. 이러한 신행의 바탕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경공부의 결과입니다.

 

그렇게 공부할 수 있는 신도들의 공간이 교회에는 충분히 마련 되어 있습니다. 어디 그 뿐 입니까? 이제는 중규모 이상의 교회를 신축할 때는 신자는 물론이고 마을의 시람들까지 이용할 수 있는 탁아시설, 공부방, PC방 등의 편의시설을 제공하여 교회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올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나라에 들어 올 때부터 의료사업, 교육사업을 통해 사회화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지금은 무료급식을 통한 사회사업에 참여하는 등의 대 사회활동에 너무나 적극적입니다. 그 모든 것이 시대에 맞는 방법이 아니면 외면당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일지라도 세상에 나올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기독교를 10이라고 보고 불교를 100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기독교는 10 중에서 8이나 9를 세상에 맞추어 쓰고 있지만 불교는 100중에서도 4 5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신도들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 배우고 익히는 공간, 세상과 나누는 공간이 절에 있어야 합니다. 대웅전은 엄청 화려하게 장엄을 해 놓지만 여름이면 덥고 겨울이면 추우며 절하고 기도하는 데만 맞게 되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침대에서 잠자고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책상에서 공부합니다. 가부좌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이들은 법당에 다리를 틀고 앉는 그 자체가 고역입니다. 이러한 젊은이들을 절로 불러들여도 생활습관에 맞지 않는 공간에서 오래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들이 교회에 가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공간에 익숙해지지만 절에 왔을 때는 시작부터 끝까지 불편할 뿐 입니다. 마음을 내어서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익숙해지는 노력을 요구하는 것은 한발 뒤진 포교방법입니다.

 

할머니불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신행공간을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은 왜 입니까? 불상주변만 잘 장엄하면 절하나 사는데 지장 없다는 거드름을 아직 부리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그에 맞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불교에는 거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무설자님, 바꾸어야 불교가 산다. 무설지실 2005-11-15)

 

 

무설자님은 절을 바꾸어야 불교가 산다고 하였다. 현재와 같은 방법으로 대응한다면 불교의 미래가 없다고 하였다. 이를 교회와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교회의 경우 모든 것을 신도 위주로 하고 있음에 반하여 절의 경우 전혀 시대상황을 따라가고 있지 못함을 말한다. 그래서 절도 기와집의 형식을 버려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입주민들의 일주문 건립반대 데모

 

팔작지붕형태의 기와 지붕이 있어야 절이라 볼 수 있을까? 울긋불긋 단청을 해야만 절의 분위기나 나는 것일까? 단청을 함으로 인하여 오히려 입주민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킨 것을 보았다. 이에 대하여 절이 혐오의 대상? 님비현상인가 종교탄압인가(2010-05-05)’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재건축단지로 지정 되어 아파트 단지 정문 입구에 절이 하나 세워 졌다. 누군가는 이에 대하여 알박기의 결과라 하였다. 어느 해인가 일주문이 건립 되었다. 울긋불긋 단청을 하기 위하여 준비중이었는데 입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즉각철거하라는 것이다.

 

 

 

 

 

왜 입주민들이 들고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울긋불긋 단청된 일주문이 아파트 입구에 있으면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 본 것임에 틀림 없다. 이렇게 본다면 울긋불긋 단청은 일부 시민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라 볼 수 있다.

 

사찰구조의 문제점

 

현시대에 맞는 절은 어떤 형태이어야할까? 이에 대하여 건축사인 무설자님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이 시대에 맞는 절의 형식에 대하여 제안한다. 제안하기 전에 현재 사찰구조의 문제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평상시에는 몇 사람이 참석하는 사십구재나 천도재 정도만 해결하고 초파일이나 큰 법회는 마당에서 신도를 수용하는 그런 사찰의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나 성당처럼 법회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집회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여름에는 비와 더위, 겨울에는 추위에도 항상 신도들을 좋은 환경에서 신행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앞이니까 더위와 추위도 이겨내야 한다고 강요하는 구태를 버려야 합니다. 이제는 집집마다, 차마다, 직장마다 에어컨이 있는 환경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에게 지금의 사찰환경은 너무 가혹한 것입니다. 그래야 매주 법회가 열릴 수 있습니다.

 

신도들만을 위환 환경이 많이 필요합니다. 지금 사찰에 신도들을 위한 공간이 있기는 합니다. 대웅전에서 삼배 올리고 공양간에서 밥 한 그릇 먹을 수 있는 대중방 이외에 어떤 공간이 있습니까? 다른 종교에는 크고 작은 교육실에 신도회를 위한 사무 공간, 탁아실, 성가연습실, 독서실 등등 신도들이 교회에서 살다시피 할 수 있는 각종 공간에 편의시설까지 풀 서비스를 하고 있는데도 사찰에는 그 어떤 서비스도 제공되고 있지 못합니다.

 

(무설자님, 절을 바꾸어야 불교가 산다. 무설지실 2005-11-15)

 

 

한국불교의 사찰구조를 보면 신도위주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는 사찰이 스님 위주라는 말과 같다. 사찰은 스님의 거처일 뿐만 아니라 수행공간이기 때문에 재가불자들이 설 자리가 없음을 말한다. 이에 반하여 교회의 경우 철저하게 신도 위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신도를 위한 공간이 많다고 하였다. 이런 차이가 오늘날 도시에서 교회천지를 만들었을 것이다.

 

바람직한 도심사찰의 모습은

 

바람직한 도심사찰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반드시 팔작지붕에 울긋불긋 단청을 해야 여법한 가람이라 볼 수 있을까? 건축사 무설자님은 바람직한 도심사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만들어 보자고 제안한다.

 

 

도시에는 너른 마당을 가진 절을 짓기가 힘이 듭니다. 땅값이 워낙 비싸기 때문입니다. 확보 가능한 땅에다 3층 이상 집을 지어야 합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마당을 두고 좌우로 요사체를 놓는 전통사찰의 모습에 익숙한 불자들은 한 건물에 사찰의 기능이 다 들어와 있는 사찰을 받아들이기에 어려울지 모릅니다.

 

우선 1층에는 주차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주차장이 없이는 1가구 1차량의 시대에 맞는 포교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만큼 많이 확보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차장을 만들고 난 뒤에는 진입공간을 독특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일주문의 개념입니다. 차안과 피안을 나누면서 하나로 만드는 공간이죠. 불이의 장이라 이름을 짓습니다.

 

2층은 요사체 영역입니다. 종무소와 공양간, 스님의 처소, 대중방 등이 들어 갑니다. 이 층에는 다목적 공간이 들어가야 합니다. 공양도 하고 차도 마시며 문화강좌도 할 수 있는 홀을 중심으로 다른 실들이 배치 됩니다. 신도들이 함께 어우러져 만남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입니다. 바라밀의 장이라 칭합니다.

 

3층은 법당이 들어갑니다. 기존 전통사찰의 전각은 횡으로 긴 평면을 가지고 있어 공간활용에 있어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에는 불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종으로 긴 형태로 바꾸면 같은 면적으로도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1평이면 약 2사람을 수용할 수 있으니 30평의 공간이 있으면 60명 정도의 법회를 할 수가 있습니다. 50평이면 100명은 함께 법회를 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정혜의 장이라 부릅니다.

 

(무설자님, 절을 바꾸어야 불교가 산다. 무설지실 2005-11-15)

 

 

건축사 무설자님에 따르면 도심사찰의 전형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땅값이 비싼 도심에서 팔작지붕형태의 전통사찰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3층 건물이라면 반드시 1층에는 주차장을 만들자고 하였다. 이는 신도들을 위한 배려이다. 2층에는 신도들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을 만들자고 하였다. 전통사찰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공간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신도위주의 공간이 만들어졌을 때 제집처럼 드나들 것이라 하였다.

 

건축사 무설자님은 바람직한 도심사찰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실제로 설계한 절을 소개 하였다. 도시형 소규모 사찰을 말한다. 편하고 정답고 늘 가까이 갈 수 있는 절이다. 이에 대하여 절, 으로 나다-(2010-07-01)’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모습이다.

 

 

 

 

 

 

 

신도서비스가 되지 않았을 때

 

오늘날 교회건물을 보면 한몸체로 되어 있다. 한 건물 안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모든 것을 신도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다 보니 교회는 편안히 머물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에 자주 가게 되는 것이다. 신도들이 교회에 자주 나오게 되면 자연스럽게 헌금도 늘어 날 것이다. 그래서 선순환이 반복되어 날로 번창하게 된다.

 

오늘날 절의 공간을 배면 신도들을 위한 배려는 거의 없다. 모든 것이 스님위주로 되어 있다. 절에 가도 마땅히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차라도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으련만 거의 없다. 이는 신도들에 대한 서비스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불편함 투성이다 보니 절에 가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시도 줄어 들게 된다. 그에 따라 교세도 날로 위축된다. 신도서비스가 되어 있지 않음에 따라 악순환만 반복 되어서 날로 쇠퇴하게 된다.

 

 

 

2015-07-2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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