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대학생인 다연회 다우, 감자돌이님이 학교 과제로 인터뷰를 요청해서 나눈 대화를 정리해서 보내온 내용 입니다.
-차향기 가득한 인터뷰
도반 건축사사무소 대표 김정관
일시 : 2013년 10월 19일 토요일 오후 2시 – 4시 30분
장소 :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소재 도반 건축사사무소 사무실
대상 : 김정관 -도반 건축사사무소 대표
김정관님은 함께 차(茶)를 마시는 모임인 ‘다연회’에서 처음 만나났다. 김정관님은 ‘다연회’의 회장으로서 7년간 이 모임을 이끌어왔다. 아무런 강제나 대가가 없는 일을 자발적으로 7년이나 끊임없이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인터뷰를 요청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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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인터넷에서 쓰시는 이름인 무설자(無說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근래에 자의든 타의든 간에 말을 좀 많이 하게 됩니다. 강의나 강연을 하기도 하고, 모임에 가면 주최자로서 이야기도 이끌어 가야하고, 작년에는 등단까지 해서 글도 많이 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을 많이 하고 글도 많이 쓰다 보니, 덕을 보기 보다는 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역설적인 이야기인데, 불국사의 강당 이름이 무설전無說殿입니다. 강당이라는 곳은 말을 하는 곳인데, 왜 그곳이 무설전일까요? 무無라는 단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었습니다. 없다는 뜻도 있지만 무한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유有라는 개념은 ‘있다’라는 개념인데, 그 반대되는 개념인 무는 ‘없다’에 포괄된 ‘무한’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양을 측정 해낼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많은 숫자라도 한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무는 ‘헤아릴 수 없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무無이므로 무한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설이 가지는 뜻은 한계가 있는, 측정되는 소리로서의 말이 아니라, ‘무한한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이왕 말을 하려면 이런 말을 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차(茶)를 기호품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의미를 가지고 대하고 계신가요?
저도 차를 처음 마실 때는, 1980년대 초부터 차를 마셨는데, 그저 음료로서 마셨습니다. 그리고 2006년부터 보이차를 접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차를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반적인 음료는 스토리텔링이 필요가 없습니다. 커피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커피를 즐길 때는 커피에 대한 지식, 커피를 추출하는 기술 정도만 익히면 커피는 즐기는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사실 자기만족을 위한 준비와 즐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차를 마실 때는 팽주(烹主:차를 우려내는 사람)와 팽객(烹客:차를 대접 받는 사람)의 관계가 반드시 생깁니다. 내어 주는 사람이 있고 받아서 마시는 사람이 있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내가 팽주가 되었을 때 손님에게 ‘어떤 차를 드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던지, 손님의 상황에 따라 ‘이 손님에게는 이런 차가 좋겠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차를 준비하게 됩니다. 즉, 차를 마시는 행위에 앞서 팽객을 대하는 마음이 앞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팽객이 되어 이런 대접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업무 때문에 간 곳에서도 비서처럼 제3자가 타주는 것을 한 잔 마셔버리고 나면, 차는 없고 업무적 관계만 남습니다. 그런데 차를 대접하게 되면, 팽주가 자신을 대접하는 마음부터 느끼게 됩니다. 즉, 차라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대접 받는 사람과, 대접하는 사람의 관계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를 통해 차가 만들어주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내어주는 정성과 받아 마시는 고마움이 생기므로 각자가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집에서 어머니가 자녀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야, 이리 나와봐.”라고 한다면 반응은 뻔할 것입니다. 그러나 “차 한잔 할래”라고 먼저 다가서고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차를 우려 준다면, 자녀의 반응 역시 달라질 것입니다. 이처럼, 차를 통한 관계에서는 예禮라는 것이 먼저 형성됩니다. 함께 마신는 차가 고급차이든, 저급차이든, 그 차의 가격이 얼마이든 상관없이, 예가 먼저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차를 마시면서도 ‘이 차가 얼마짜리 차입니다. 맛이 어떻습니까?’라는 마음가짐으로 다가간다면 앞서 말한 진정한 차 자리가 아닌, 그저 자기 자랑의 자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최선의 차 자리는 차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보다는 차가 매개가 되는 자리입니다.
또, 이 벽에 걸린 족자를 보시면 ‘수여좌誰與坐(누구와 함께 자리를 하고 있는가)’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함께 앉게 되는 모든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대하듯이 상대방을 대해야 합니다. 내가 존중 받고 싶으면 상대방을 존중해야합니다. 상대방을 무시하면 상대 역시 나를 무시하게 되어있습니다. 팽주가 팽객을 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자신을 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차 자리가 달라질 것입니다.
다연회의 모토도 “차보다 사람이 중요한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연회가 7년 넘게 유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설자님의 학창시절은 어떠셨습니까?
제가 대학을 다닐 때는 시대가 급변하던 시기였습니다. 제가 대학 2학년일 때 부마항쟁과 10.26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전두환이 정권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런 시대적 혼란기에 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졸업하면 취업은 보장이 되었던 시기기도 하지요. 그래서 세상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지금 학생들처럼 학문에 대한 지적인 배움을 중시하기보다는, 세상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원래 국문과를 지원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로 건축과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건축과를 갔지만 하고 싶던 글쓰기를 많이 했습니다. 또 불교에 심취해서 불교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저는 학창시절 바둑, 장기, 당구, 카드, 담배, 술 같이 남들과 어울리는 일은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글쓰기와 불교 공부 반, 전공 공부 반 이렇게 대학생활을 했습니다.
이렇게 사회생활 반, 내 생활 반을 한다는 것이 일관성 있게 지금까지 지켜온 제 원칙입니다. 이 사무실도 보시면 이쪽 절반은 현장입니다. 그리고 반은 부처님, 경전, 차가 있는 장소입니다. 이렇게 반반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 제 스스로 타협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이것이 잣대입니다. 만일 ‘이 앞 탁자의 길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누군가는 45cm라고 주장하고 저는 30cm라고 주장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렇게 서로 주장하면 싸움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를 간단히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입니다.
이런 역할을 하는 잣대가 있으면 내가 넘치는지, 모자라는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 잣대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데 현재는 이런 잣대를 가진 사람들이 적은 것 같습니다. 만일 종교를 가지면 그 종교가 잣대가 될 수 있고, 철학을 가지면 그 철학이 자신의 잣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잣대에 의해서 양보를 하든지 고집을 내세우든지, 혹은 포기를 내세우든지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도 ‘내 잣대로 안 되겠다, 이 사람은 포기해야겠다, 이 사람에게는 절대 굽히면 안 되겠다. 내 잣대대로 밀고나가야겠다.’라는 식의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잣대가 잇는 사람은 그 잣대에 의해 진퇴를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잣대를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가장 포괄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인들은 모든 사람과 다투지 않고 포용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성인의 잣대는 모든 사람에게 다 맞출 수 있는 잣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잣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과 싸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때에 따라서는 상대방에 따라 잣대를 움직여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만일 상대가 말을 잘하면 리액션을 잘 해준다던지, 말을 하지 못하면 조심스레 말을 해나가고 대답을 유도해나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잣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내공이 엄청난 사람입니다. 성인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상대에 따라 잣대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종교가 잣대가 될 수 있다고 앞서 말했듯이, 저는 잣대를 불교로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는 신이 있으며, 신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고, 신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신이 없습니다. 대신 부처님은 ‘나는 인간이다’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갔던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르치는 길을 잘 보고 꾸준히 간다면 도달 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의심을 하거나 가지 않는다면 도달 하지 못할 것이라고도 가르칩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그렇다면 불자로서 바람직한 삶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서 바람직한 삶은 ‘교조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아마 형식적인 답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과因果입니다.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바로 내가 과거에 만들어 놓은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과의 진정한 의미는 과거에 집착하거나 현재의 결과에 불만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현재의 결과는 받아들이고 대신 앞날을 위해 지금 어떠한 업을 짓느냐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인과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불자라면 현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미래를 위해 지금부터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 불자로서 바람직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의 의견으로 건축과를 들어갔다고 하셨습니다. 원하지 않는 전공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꾸준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집이라는 것은 인문학의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이스 칸(Louis Kahn, 1901~1974)에 의하면 집을 짓는 다는 것은 창조의 작업입니다. 조물주가 자연을 창조한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유일하게 그 창조의 권한을 준 직업이 바로 건축가입니다. “너희가 사는 환경은 건축가가 창조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건축가의 작업도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작이 아니라 창조인 것입니다. 종교에서 사제는 신의 대리 행위자에 불과하지만, 우리 건축가들은 신이 하는 일을 직접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문학적인 사고가 없으면 건축은 할 수가 없습니다. 루이스 칸이 집을 짓고 나서 누군가가 어떤 의도로 집을 지었냐고 물었을 때, 그는 “저 벽돌이 나를 이렇게 써달라고 한 이야기를 잘 듣고 만들었을 뿐이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재료를 어떻게 사용해야 가장 효율적인 작업이 될 것인가를 심사숙고하는 작업을 반드시 거쳤던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건축가 김수근(1931~1986)선생도 한국의 예술 보듬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데모를 하고 쫓겨 다니던 유홍준을 받아주기도 하고, ‘공간’이라는 사옥을 통해 여러 분야의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활동무대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또 「공간」이라는 종합예술 건축문화 잡지를 창간하여 건축과 미술 등 문화예술을 널리 보급하는 데 정열을 바쳤습니다. 이런 일들은 사고의 역량과 인문학적 소양 없이는 불가능 합니다.
건축의 이런 면들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비록 스스로 선택한 길은 아니었지만 적성에 맞음을 느끼고 계속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까지의 건축물 중에 가장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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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옥 처마의 기능 > ‘가’는 여름일 때 태양의 위치, ‘나’는 겨울일 때 태양의 위치. |
어느 특정 건축물을 지목하기보다는, 과학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한옥을 들겠습니다. 한옥의 경우 모든 평면배치는 똑같은 집에 없이 건축주가 결정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듈화 되어있습니다. 집 한 칸의 폭은 얼마인지, 높이는 얼마인지 대목을 통해 대대로 전승되어온 법식이 있습니다. 이렇게 만든 집이 천년을 갑니다. 콘크리트로 지은 집은 100년이 넘는 건물이 흔치 않은데 말이지요.
한옥의 주 재료인 나무는 물이나 불, 그리고 충격에 매우 약한데 어떻게 천년을 버틸까요.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봉정사 극락전은 고려시대의 건축물인데, 거의 1000년이 되어갑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나무는 약하기 때문에 원상태 유지할 수 있도록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처마가 나오고, 토대가 땅위로 올라옴으로써 비가 닿지 않고 바닥의 습기에 노출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1000년을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옥 건축은 지극히 합리적이지요. 또 다른 예로, 정자의 문 같은 경우 한쪽으로 완전히 접어버리던가, 접은 후 천장에 걸어 기둥만 남도록 해서 공간 활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한옥을 모티프로 주택설계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느끼는 점은 과연 이제까지 해온 작업들이 ‘과연 얼마나 알고서 한 것들인가?’, ‘왜 이렇게 하는지 것인지 알고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문 하나의 위치로 방안의 공간이 달라집니다. 문 때문에 통로의 위치가 결정되고 그에 따라 쓸 수 있는 공간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한옥의 문 배치는 그런 면에서 공간을 매우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이처럼 한옥의 건축에는 하나하나가 이유가 없는 게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평면적 배치는 마음대로해도 하드웨어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이는 유구한 전통을 통해 마련되고 전수되어 온 것입니다. 대목이 제자인 목수를 독립시킬 때는, 그 제자가 나무 깎는 기술을 완벽히 익혀서가 아니라, 집을 짓는 노하우를 충분히 전수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처마 하나를 내더라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처마의 기능 중 하나는 방에 들어오는 햇빛의 양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겨울에는 태양의 각도가 낮고 여름에는 각도가 높습니다. 만일 적당한 길이로 처마가 나와 주면, 겨울에는 햇빛이 방안에 충분히 들어오고, 여름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집니다. 또 처마가 있다면 비가와도 문을 열거나 닫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마가 없다면 문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처마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것을 모르고 처마를 아예 만들지 않습니다. 이것은 전통을 존중하는 인문학적 사고의 실종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배우고, 인문학을 배우는 것은 이런 이면의 이유나 의미를 배우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깊은 의미를 가지고 전수되어온 전통이 엄정하게 아직까지 숨 쉬고 있는 것이 한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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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철학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주택은 작은 우주입니다. 처칠은 “사람이 집을 만들지만, 집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했습니다. 원래 지금 이 방도 창가 쪽이 작업공간이었고 반대쪽이 차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방이 서향이라서 오후가 되면 너무 더워져서 작업실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두 구역을 서로 바꾸었습니다. 그랬더니 작업실은 더 안쪽에 위치함으로써 집중력도 높아지고 햇빛으로부터 해방되었고, 반대로 차실은 누구나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 공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그 공간에 있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정해집니다.
이 작은 방에서도 그런데 집은 더 그렇지 않겠습니까. 한옥에는 사랑채가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주택은 경주 양동마을에 있는 ‘관가정觀稼亭’입니다. 이 관가정은 사랑채에서 사람들이 드나들어도 안채 사람들에게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이 집을 보면서 하나를 느꼈습니다. 관가정이 바로 ‘사람을 불러들이는 집’이라는 것입니다. 멀리 나가 있을 때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집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관가정 평면도는 http://www.culture.go.kr/art/knowledge/directoryView_sum.jsp?ar_vvm_cd_seq=912 에서 빌려왔습니다.
(귀한 자료를 허락 없이 전재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그런데 요즘의 아파트는 방문을 닫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방들이 서로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원리를 다른 예를 들어 설명해보면, 지하철에 사람이 붐비게 되면 사람은 움츠리게 됩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지하철이 한산해지면 사람들은 경계심을 풀게 됩니다. 같은 이치로 방들이 서로 붙어 있는 아파트에서는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방문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파트의 방문은 닫아놓으면 곧 벽이 됩니다. 그러므로 소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님이 불러도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벽으로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옥의 문은 창호지로 만들어진 반半개방적인 문입니다. 자식들이 방에서 글을 읽으면 떨어져 있는 안방에서 들을 수 있는 거지요. 그리고 안방에서 불러도 자식들이 방에서 대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간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닿아있는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제가 설계한 건물인 이입재二入齊에 적용시켰습니다. 이입재는 그림처럼 개인공간과 공용공간을 분리시켜 놓았습니다. 집이 이런 구조로 되어있다면 방문을 닫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만의 공간이 통제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방문이 열리게 되면 다른 곳에서 불렀을 때 대답을 할 것이고 소통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떨어져 있으니까 오히려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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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입재 전경 > |
또 거실에서 손님이 있더라도 자신의 방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을 집에 불러올 수 있습니다. 아버지 친구, 아이들 친구가 와서 거실에서 마음껏 웃고 떠들어도 됩니다. 방이나 서재에 가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집에서’라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이제 내 집이 중심이 되어 세상을 돌릴 수 있습니다. 또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오니 아빠친구, 엄마친구, 아들친구를 서로 알 수 있게 되고 가족 간의 교류도 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잘 지은 집은 사람을 불러들일 수 있게 만듭니다.
이처럼 ‘사람을 불러들이는 집’을 짓자는 것이 제 건축 철학이고, 이렇게 건축을 통해서 세상이 바뀌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구조를 가질 수 없는, 이미 지어진 아파트에 살 수 밖에 없는 가정은 어떻게 하면 문을 열 수 있을까요?
그 방법 중의 하나는 거실에서 TV를 없애는 것입니다. 대신 거실을 서재로, 혹은 차실로 바꾸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대화가 이루어질 것이고 방문이 열릴 것입니다. 틱낫한 스님은 강연에서 원래 결혼을 하는 이유가 ‘같은 인생의 같은 방향을 보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마주 봄으로써 만나게 되었고, 만나서는 같은 방향을 보기 위해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나서는 마주보면 싸우고 싸우지 않기 위해 같은 방향을 보는데, 그 방향이 바로 TV라고 합니다. 그래서 TV를 없애면 서로 마주 볼 수 있게 하고. 이렇게 서로 마주 볼 때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고 문은 열리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실에 차 자리를 편다면 대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차는 처음에도 말했듯이 관계를 만들어 주고 소통을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차는 이 시대에 잃었던 것을 회복할 수 있는 매개체라고 생각합니다.
-삶에서 전환점이 되는 일이 있으셨나요?
저는 원래 운명론자였습니다. 운명이 노력에 의해 길이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라면, 숙명은 이미 길이 정해진 것입니다. 기독교적으로 보면 예정설이라 할 수 있고, 운명은 자유의지론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공부가 어중간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는 기술을 배워서 일찍 직업을 가지는 것을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가고 싶었던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지 못하고 부산공고에 입학했습니다. 부산 공고에 가서는 줄곧 상위권이었습니다. 저의 꿈은 국문학을 전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공고에 진학했기 때문에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기반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말에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을 위해 대학정원 10%을 배당하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지금의 수시입학 같은 것이지요. 그때 예비고사에서 좋은 성적이나와서 서울대를 갈 수도 있었지요. 그러나 저는 서울대를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공고출신이 인문계를 거쳐 서울대를 온 학생들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학금을 받고 부산대에 갔습니다. 이게 운명이었을까요? 숙명이었을까요?
그리고 대학 졸업 무렵 불황이 왔습니다. 그래서 다들 취업 걱정을 하던 때입니다. 그런데 졸업작품전에 당시 부산에서 제일 잘나가던 일신설계에서 졸업작품전을 와서 보시고는, 제게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저로서는 엄두를 내지 못한 곳에 선택되어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또한 운명이었을까요? 숙명이었을까요?
고등학교 진학, 대학교 진학, 취업 모두 이런 식으로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길이 펼쳐져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신설계에 들어갔는데 그곳 직원들은 유학파를 비롯해 학벌이 내로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가 공고출신이라는 열등감에 쌓여 있었습니다. 저 자신을 부산대를 나온 것이 아니고 부산공고를 나왔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몸으로 때웠습니다. 집에도 가지 않고 현장에서 살다시피 해서 실무를 익혔습니다.
그러던 중 일신설계에서 「이상건축」이라는 건축전문지를 창간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평소에 글을 쓰다보니 편집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원탁에 둘러앉아서 5명이 토론을 하는데, 그 안에서 박사 출신이나 유학을 갔다 온 사람들과 같은 수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 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도 내가 열심히 하면 삶이 전환될 수 있을 것 이라는 운명론자였습니다. 그런데 건축사를 취득하고 회사를 직접 운영하는 입장이 되니까 여러 가지로 불안해지다보니 장난삼아 인터넷 사주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가 이때까지 살아온 줄거리가 거기 다 있었습니다. 제가 개척해 왔다고 생각했던 제 삶이 정해진 길을 왔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은 스스로 노력을 하더라도 큰 흐름은 거스를 수는 없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은연 중에 숙명론자가 되어 갔었습니다. 그 뒤로는 소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지나친 집착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큰 도전보다는 우선 내 앞에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쪽으로 집중을 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지요. 또 어떤 사람을 새로 만나려고 하기 보다는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전환점들 자체도 제 의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계단처럼 한 단계를 올라서면 다른 층이 기다리고 있고, 길을 가다 내가 갈 길이 정해져서 그 길을 가고 이렇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좌우명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저의 좌우명은 ‘불퇴보리심不退菩提心’입니다. 보리심은 궁극적 진리를 찾으려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부터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저의 좌우명입니다. 물론 인생에 정답은 없겠지만, 그 정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올바로 사는 것인가?’ ‘내 삶이 온당한 목적은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추구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감자돌이나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해주십시오.
우선 개인적으로 감자돌이1)에게는 이 말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닉네임을 만드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의미를 가지고 감자돌이라는 닉네임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닉네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이름이 셋입니다. 제 본명인 김정관, 제 법명인 원성, 그리고 제 아호 겸 인터넷 닉네임인 무설자입니다. 법명은 이 시대 마지막 선승이라 불리신 통도사의 경봉스님께 받았습니다. 제 사주엔 오행 중에 금金이 4개나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사람을 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둥글게 살라고 둥글 원에 이룰 성자를 써서 성원圓成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무설자라는 이름도 맨 처음 말씀드렸던 것처럼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서 지었습니다.
이처럼 이름을 지을 때 허투루 짓지 말고, 감자돌이도 평생 쓸 수 있는,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쓸 수 있는 이름을 하나 만들어서 인생의 디딤돌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감자돌이를 비롯해 지금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학문을 어떻게 우리 삶과 연결시킬 수 있는지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학문으로서의 가치로 본다면, 어떤 학문이든지 삶과 유리되면 가치가 없습니다. 반드시 어떻게 우리 삶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 인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정치와 종교가 사회적으로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세상은 변화하는데도 바뀌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는 지금 수평적인 구조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정치와 종교는 수직적인 구조를 유지하고 바꾸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과 유리되어버렸기 때문에 정치와 종교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삶과의 연결고리를 찾고 자신의 가치를 사회와 어떻게 교환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지금의 전공을 직업으로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와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 사람은 고립되고 그 학문은 죽은 학문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생각 없이, 혹은 마냥 좋아서 학문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며, 인생의 소비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요즘 멘토링이 유행인데 열린 마음만 가진다면 멘토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전통의 동양적 스승-제자 관계와 멘토-멘티 관계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스승-제자 관계는 스승이 제자를 선택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달마대사는 혜가스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어떤 제자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혜가 스님이 제자로 받아들여달라고 왔을 때도 “이 눈을 붉게 만들 수 있겠느냐?”라고 물어본 후 혜가 스님이 차고 있던 칼로 자신의 왼팔을 잘라 흰 눈을 붉게 물들여 보이고 나서야 자신의 제자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나 멘토-멘티 관계는 다릅니다. 거꾸로 멘티가 멘토를 선택하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멘토링 과정은, 모든 것을 통제받는 스승-제자 관계와는 달리, 멘토가 제시하는 것을 따라가고 그 결과를 다시 보고하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멘토링 끝나면 멘토-멘티 관계도 사라집니다. 너무 무겁게 다가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배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찾기만 한다면, 주위에 멘토로 삼을 수 있는 분은 정말 많습니다. 스스로 좋은 멘티가 된다면 좋은 멘토는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좋은 분들을 멘토로 삼아서 배우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201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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