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 이야기/에세이 차 시음기

가을 밤, 고수차를 마시며

무설자 2011. 9. 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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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설자의 에세이 차 시음기

가을 밤, 고수차를 마시며

 

 

 

 

가을입니다.

올 여름은 비와 함께 짙은 습도 속에서 살다보니 제대로 차맛을 음미하지 못하고 지난 것 같습니다.

워낙 차를 좋아하다보니 아침부터 밤까지 마시긴 했지만 그냥 마셨을 뿐이라고 해야겠지요.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고 해도 차는 뜨겁게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가끔 냉차로 마시기도 하는데 머그잔에 가득 부어서 훌훌 마시게 되니 제대로 차맛을 음미할 수가 없습니다.

작은 찻잔으로 뜨겁게 마셔야 한 모금 입안에 머금고 그 차만의  맛과 향을 온전히 느낄 수 있지요.

 

그래서 내 몸도 귀찮은 여름동안에는 그냥 차를 마셨다고 한 것입니다.

이제 제대로 차맛을 즐길 수 있는 가을이 왔습니다.

제가 차를 혼자 마시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늦은 밤입니다.

 

휴일을 앞둔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

주 5일제 근무를 지키지 못하는 저는 토요일 밤이 혼자 차를 즐기는 시간입니다.

자정을 넘겨서 혼자 차맛을 음미하노라면 그냥 행복해집니다.

 

가을이라고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가 차맛을 더해 줍니다.

오늘 밤은 무슨 차를 마시며 나만의 행복을 느껴볼까나하고 제가 가진 차를 돌아봅니다.

이렇게 마실 차를 떠올려보는 생각으로도 벌써 행복하다는 느낌에 젖어들게 됩니다.

 

 

 

우리집 거실 한켠에 마련한 조촐한 찻자리의 그림입니다.

다실이 있어야 차를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집에서 차를 마실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거실에서 차를 마셔야만 가족들과 항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좋은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도 처음에는 서재에 작은 찻상을 준비하여 차실로 분위기를 잡았었습니다.

하지만 아내와 나 둘 밖에 없는 집에서 차를 마시려고 혼자 차실로 갈 수 없어서 차판을 거실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차를 스스로 마시지 않는 아내도 이제는 주는 차는 잘 받아 마시고 있답니다.

 

 

차판에 자사호가 세개 보이는데 평소에는 두 개만 나와 있습니다.

200cc는 흑차 전용, 120cc는 숙차 전용이며 노차나 생차는 보이찻장에서 맘에 드는 호를 선택하여 쓰게 됩니다.

오늘의 선수는 수평호가 간택이 되었습니다.

 

 

수평호는 호의 두께가 얇아서 뚜껑이든 몸체든 떨어 뜨리면 십중팔구 깨뜨려지고 맙니다.

아끼던 수평호의 뚜껑을 손으로 옮기다가 차판에 떨어 뜨렸는데 깨지고 말더군요.

그래서 그 때부터 가능한 나무집게를 이용해서 다구를 쓰는 버릇을 들이고 있습니다.

 

 

차판에 놓고 평소에 쓰는 잔입니다.

차호는 어쩔 수 없이 중국 물건으로 쓰지만 잔은 우리 그릇을 쓰고 있는데 무엇보다 손에 입술에 닿는 촉감이 차맛을 더해주는 것 같습니다.

큰 잔은 아내 잔이고 작은 잔은 내 잔인데 아내는 조금 식은 차를 '완샷'하는 식으로 마시기를 좋아해서큰 잔으로 ...

 

 

오늘 밤에 마실 차는 진주에서 진다랑이라는 다원을 운영하는 다우가 나눠준 아주 믿을만한 고수차랍니다.

이제는 그 다우는 제게 둘도 없는 벗으로, 마음을 의지하는 형같은 분인데 귀한 차라며 건네 주었습니다.

좋은 차를 얻었을 때 생각나는 다우, 그게 저였기에 이렇게 챙겨두었다가 전해주신 것일까요? ㅎㅎㅎ^^

 

 

고수차...고수차 하지만 몇백년 된 나무에서 채취한 봄차를 마시기란 쉽지 않습니다.

만약 고수차라고 해서 마셨는데 감동은 아니라도 긍정적인 감흥이 일지 않으면 그 차는 진정한 고수차가 아니라고 봅니다.

고수차라고 통칭하지만 수령, 지역, 계절 등 차맛을 좌우할 많은 요인이 있다고 해도 고수차는 바로 마셔서 맛있는 차라야 합니다.

 

최소한 100년은 넘은 차나무, 가을차도 괜찮지만 봄찻잎으로 깨끗하고 정성들여 만들었다면 햇차로 마셔도 아주 좋습니다.

어떤 분은 고수차가 맛과 향이 좋다면 후발효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하지만 제게 고수차는 녹차처럼 지금 마시는 차입니다.

제가 고수차를 구입하기 시작한 건 2008년부터인데 세월이 만들어가는 맛을 즐기는 것이 바로 보이차만이 주는 재미입니다.

 

해마다 큰 폭으로 찻값이 올라가는 고수차, 이제는 싼 맛에 보이차를 마신다는 이야기는 옛말이 되었습니다.

통단위로 통 크게 구입하기에는 부담이 되기에 편 단위로 구입해서 햇차로 그해마다 마시는 차로 만나야 합니다.

그럼 찻잎을 한번 비비고 한번 덖은 후에 햇볕으로 말리는 쇄청차가 마실만한 차맛을 보여 줄까요?

 

 

쇄청모차라고 부르는 보이차의 생차는 재배차의 경우 녹차와 비교하면 풋내가 많이 나서 바로 마시기에 적당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덖음녹차는 덖고 비비는 과정을 불을 써서 솥에서 처리하기에 구수한 맛과 함께 익힌 맛이 좋지요.

하지만 쇄청모차인 생차는 장기보관이 상온에서 가능하게 되고 녹차는 습기에 노출되면 곧 녹차 고유의 맛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제가 만나는 고수차는 그 맛과 향이 최고급 녹차와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고수차 산지별 특유의 향과 맛이 보이차를 즐기는 재미를 누리는 건 소수가 누리는 특권입니다.

 

 

 

먼저 잠든 아내의 잔은 비어 있습니다.

어느 산의 고수차인지 알 수 없지만 맑은 달콤함이 입 안에 가득 차는 게 가을보다 봄의 향기입니다.

탕색은 녹차보다 더 연하지만 맛의 풍부함은 대엽종의 스케일을 담고 있겠지요.

 

 

백자잔에 차를 담으니 유백색의 탕색이 드러납니다.

보이차, 특히 제가 고수차를 즐기는 재미는 산지별 차맛을 찾아 내며 마시는 것입니다.

이 차는 운보연의 '십년심'이라고 하는 오래된 야방차의 맛과 맥락이 닿는 것 같습니다.

 

맑은 단맛이 감미로운 차,

깊어가는 가을 밤에 둥근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런 느낌이라 할까요?

다우가 건네 준 귀한 차를 마시는 이 밤도 깊어갑니다.

 

 

 

무 설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