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에세이 고찰순례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지리산 금대암, 영원사에서

무설자 2009. 11. 2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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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설자의 에세이 고찰순례기 0911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지리산 금대암, 영원사에서

                                                                                                                           



금대암


틀에 박힌 고찰순례길을 벗어나는 일정으로 다녀온 길이었습니다. 작은 버스에 적은 인원이 동참한 2009년 가을 성지순례입니다. 이미 가을이 지나가는 겨울의 문턱에서 바쁜 일정으로 잡아 스물두분이 동참한 길입니다. 지리산의 작은 절, 그렇지만 무거운 절을 찾아 나섭니다.

 

지리산 제일 명당이라는 금대암, 그 다음이라는 상무주암과 영원사를 참배하는 일정이었지만 금대암 근처의 안국사를 들러 영원사를 참배하고 나니 이미 짧은 해는 기울고 맙니다. 상무주암은 언제든 들를 수 있으니 마음 가득 담아온 것이 많아서 넉넉히 나눌 이야기를 풀어봅니다.

 

참 오랜만에 찾은 지리산은 이제 잎이 거의 없는 나무들로 온 산에 가득합니다. 잎 떨어진 빈 가지의 앙상한 빈 모습은 청정한 수행자의 분위기로 다가옵니다. 푸른 숲이라고 부르는 그 가득함이 이렇게 순식간에 비워지는 계절의 결단이 느껴집니다. 가파른 길 위에는 작은 암자가 있습니다. 그 암자까지도 차가 들어가는 길이 나 있는 것이 신기하지만...

 

첫번째 길은 금대암입니다. 지리산의 방장이라는 자리입니다. 지리산 주요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는 기가 막힌 자리이지요. 볼거리는 적지만 담아올 것은 많답니다. 눈으로 담아올 것과 마음에 담아 올 것은 다릅니다. 무엇을 담아올지는 제 각각의 몫이겠지요.  


 

 

 

 

 

 

 

 

 

 

지리산을 한눈에 바라보며 금대암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의 그 맛....^^



영원사

 

이제 찾아나서는 길은 오르고 또 오르고 돌고 또 돌아서 산 저 너머에 40년을 산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선승을 만나러갑니다. 그 절에는 정년퇴임 후 10년을 정진하는 거사님도 계신답니다. 그 분들은 무엇을 찾는 것일까요? 무엇을 찾은 것일까요? 그렇게 찾는 것으로 매일 새로운 날을 맞고 그렇게 찾은 것으로 삶은 새로워질까요?

 

차가 가파른 길을 오르다가 한계를 느끼나봅니다. 몇 명은 내려야합니다. 무게가 감당이 되지 않으면 그만큼 내려놓아야 하지요. 내가 바라는 것을 찾아가는 이런 길을 차를 타고 편히 가서는 안 되지요. 땀 흘리며 다리의 통증을 참아가며 힘들게 어렵게 가야 만남의 가치도 들을 수 있는 마음도 지닐 수가 있습니다. 그런 방법을 잊어버린 우리네 삶은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소홀히 여기고 맙니다.

 

반을 내려놓은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가파른 코스를 통과하니 얼마 남지 않은 길인데도 다시 차에 올라 다시 편안함을 선택합니다. 차를 타지 않은 몇 분은 걸어서 올라옵니다. 그렇게 도착해서는 타고 올 걸 힘들게 걸어서 왔다며 투덜거립니다. 불평하는 그 마음을 거둘 수 있었으면 더 큰 만남을 가졌을 텐데.

 

영원사靈源寺, 통일신라시대에 영원대사가 창건할 때 얽힌 일화부터 예사롭지 않은 도량입니다. 영원사는 고승들이 스쳐간 방명록이라고 할 수 있는 조실안록(祖室案錄)을 보면 부용영관(芙蓉靈觀), 서산대사, 청매(靑梅), 사명(四溟), 지안(志安), 설파 상언(雪坡 常彦), 포광(包光) 스님 등 당대의 쟁쟁한 고승들이 109명이나 이곳에서 도를 닦았답니다.

 

 

 

관광객이나 다름없는 객을 맞아주실 리 없을 것인데 회장님께서 미리 말씀을 넣어두셔서 대일 스님께서 편안한 미소를 머금은 짧지만 깊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영원사에서 수행한 스님들을 이야기해 주시며 그 선맥을 잇는 기운을 한번 느껴 보라고 하시지만 인적 없는 산사에 내가 있을 뿐이었지요. 


같이 간 도반들은 영원사에서 보낸 짧은 시간에 무엇을 느꼈을까요? 찾아오는 사람도 드물고 머무르는 사람도 적은 이 절에서 저는 금강경 사구게를 떠올렸습니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모습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노니

만약 모든 모습을 모습 그대로가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게 되리라.

 

 

 

대일 스님

  

 

 

 

 

 

 

 

 

 

 

 

 

 

 

 

 

청매조사 부도

 

 

산 속에 있는 절이나 도시에 세우는 절, 교회, 성당들마저 크게 화려하게 짓는 것을 봅니다. 동양 최고 크기의 불상을 조성하고 천불 만불을 만들어서 사람의 발걸음을 이끄는 절은 금강경 사구게의 가르침과 어떤 의미에서 닿을 수 있는 것일까요? 인적 없는 깊은 절에 깨달은 한 분이 계시다면 그 분으로 말미암아서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도리를 가르치는 ‘사구게를 전하라’는 간절함을 생각해 봅니다.

 

왜 수행을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욕심을 물질로 채움으로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비워내어야만 만족함의 의미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모습 지어진 것의 허망함을 얘기하시고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라고 여기며 더 가지지 못해 안달하며 사는 중생심을 다스리라고 하신 것이지요.

 

꼭 가져야 하는 양을 알아 그만큼만을 가지고 나머지 여력은 물질이 아닌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닐 수 있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수행의 방법과 수행처는 꼭 이 산속이 아니더라도 가능할 것입니다. 앉고 서고 머무르는 곳이 바로 수행처요,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가 바로 공부꺼리가 됩니다.

 

건너편 산등성이로 기울어가는 해를 뒤로 하고 잊고 살았던,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눈으로 보았던 건 작은 절이었지만 마음에 담아온 것은 무게로 달 수 없는 큰 도리입니다. 대일 스님과 광덕 거사님께 들었던 잠깐 시간의 이야기에서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채비해 봅니다. (2009, 11)



무 설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