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이야기/사찰건축을 위한 제언

불교의 미래, 절을 바꿔 지어야 불교가 산다

무설자 2005. 11. 15.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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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사무실 근처에 규모가 제법 큰 포교당이 들어 섰습니다.
그런데 그냥 일반적인 모습의 집입니다.
박스 형태로 짓고 난간을 기와로 장식해 절 분위기를 조금 내었을 뿐 입니다.
 
간판만 절이지 분위기는 영 아닙니다.
이제 기와집이 아닌시대에 맞는 절의 형식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프로그램도 없고 현대식의 절을 제대로 제안할 건축가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건축가인 제가 큰 사찰부터 포교당까지 현대식 사찰에 대한 제안을 준비했습니다.
콘크리트로 된 절을 설계를 하기는 했지만 아직 기와를 포기하지 못하는 스님을 설득하지 못해 양복에 갓쓰는 형식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와를 벗은 우리 시대의 절을 미리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스님들과 불사를 준비하는 이들이 읽고 사찰을 짓는데 반영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저를 필요로 할 경우 자문을 해 드릴 준비도 해 놓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불교카페에 많이 퍼 옮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설자 합장
   
불교의 미래, 절을 바꿔 지어야 불교가 산다

 

1. 왜 절에 다니십니까?

2. 지켜져야 하는 상가의 룰

3. 타종교에서 배우는 해법

4. 젊은이들에게 종교를 물었더니

5. 이 시대에 필요한 절의 형식

6. 이런 공간이 있어야 이 시대의 절

7. 새로운 형식의 사찰, 제안 하나

8. 불교의 미래를 위한 불자건축사의 역할

 

 

 

 

 

왜 절에 다니십니까?

 

“왜 절에 다니십니까?”

하고 질문을 던졌을 때 어떤 대답이면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습니까?

“그냥 분위기가 좋아서요.”

라는 대답일 것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절을 떠올리는 이미지는 ‘절에 가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진다’라고 하는 관념적인 상상일 것 같습니다. 그 ‘절’이라는 건 아마도 산사일 것입니다. 산과 어우러지는 풍경 속의 절, 이건 아마 종교가 담긴 그릇으로의 절이기보다는 산의 풍경과 어울리는 분위기가 주는 느낌으로 와 닿는 친근감일 것입니다.

 

이미 산사 중에서 큰 절은 대부분 수행자의 공간이기보다는 문화재로서 관광객을 위한 관람의 대상이 되어 버린지 오래입니다. 오히려 관람편의를 위한 쪽-작은 암자에 대형주차장이 설치되는 등 수익용 문화재로 적극적으로 바뀌어져 가고 있습니다. 부처님을 따르는 사부대중을 위한 공간이기보다는 구경꺼리를 필요로 하는 관광객의 공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옛 절이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이제는 온전한 수행처로서 이 시대에 어울리는 절은 어디에 있을까요?

 

“절에 왜 갑니까?”

라는 질문에는 당연히 이런 대답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공부하러 갑니다.” 

 

불교가 새바람을 타고 있습니다. 사세寺勢를 키워가고 있는 절들의 공통점은 거의 '신도들이 공부 하는 절'이라는 것입니다. 교양대학에서 시작하여 참선, 다도 등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절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습니다. 수백, 수천에서 심지어 수만 명의 신도를 수용하는 절들의 공통점입니다.

 

그 절들은 거의 도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운치있는 절을  필요로 해서 찾아가는 산사가 아니라 대도시 한복판에 배움의 열기만큼 사람들이 넘치는 특별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무조건 믿어라, 엎드려라, 빌어라’고 하는 수동태 불교가 아니라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기 위해서’ 공부하는 능동태 불교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절의 숫자는 미미해서 불자들이 가까이에서 찾기에는 너무 멀리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대부분의  절들은 아직도 대웅전 하나 번듯하게 지어놓고 거기서 재나 올려서 운영하는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절에 몇 십 년을 다녔는데도  부처님이 어떤 분이며 불교가 어떤 종교인지 설명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절에 가면 내용도 모르는 경을 따라 읽고 어떻게 삶에 적용하여 잘 살아야 하는 지도 모르는 법문을 듣습니다. 힘든 일을 만난 신도들은 사주팔자를 따져서 부적이나 받으려고 합니다. 이런 신도들에게 조상을 천도해야 집안이 평안하다면서 재 올리기를 부추겨서 큰 절을 만드려고 합니다. 자식 잘 되고 집안 편안하기를 바라며 부처님께 매달리는 것이 신행의 전부로 알고 있는 불자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렇기에 대웅전 하나 번듯하게 짓고, 주지스님 방에 신도 카드나 잘 챙기고, 공양간에 큰 방 하나면 족한 것이 이 시대의 불교 신행공간의 전부입니다. 아무리 큰 절이라도 이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큰 절에서 수행하기보다 개인절을 가져 사유재산을 늘이려는 스님들이 많으니 부처님의 정법을 따르는 불자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이래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배우고 삶에 제대로 반영해가면서 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불교를 제대로 배울 곳이 없으니 이 세상에 불교를 전할 사람이 없습니다. 사회에 불법을 널리 전하는 것이 수행자의 본분일진데 신도즐에게 기도를 권하고 재나 부추겨서 수익이나 추구하고 있다면 불교는 오래가지 못하고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아직은 절을 차리기만 하면 신도들이 모여듭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유지될 수 있을까요? 만약 절에 젊은 신도들이 없다면 그 절은 곧 문을 닫아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인데 말입니다.  우환을 없애고 욕심을 채우는 재는 무당들이 더 잘하는데.

 

 

지켜야하는 상가의 룰

 

잘 지어진 대웅전 한 채, 잘 조성된 불상 한 구, 염불 잘 하는 부전스님 한 분만 있으면 절살림 꾸려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불교교양대학마다 공부하기 위해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몰려들고 있으며 출가수행자가 아닌 재가수행자들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도시의 참선도량이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그 만만치 않은 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교양대학까지는 아니더라도 정기법회를 개설하고 어린이, 청소년, 청장년을 대상으로 불법을 전하는 절만이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할머니를 주신도 층으로 하고 있는 사찰은 경영난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절은 쇼윈도우처럼 부처님을 파는 겉모습이 아니라 불법을 전하는 본분을 찾아야 미래가 있을 것입니다.

 

불전함과 49재, 천도재 올리는 것으로 주수입을 삼고 있다면 사찰경영은 아주 후진적입니다. 공부하고 수행하는 재가 수행자들은 더 이상 그런 스님들을 외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도들은 생존경쟁을 넘어 생존을 위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 난국에 출가-수행을 통한 지도, 재가-경제활동을 통한 외호라는 출재가 약속의 불문율을 지키지 못하는 무늬만 스님에게는 불자들은 더 이상 다가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님과 신도의 관계는 어떤 조건이 지어져 있을까요? 신도가 외호外護라는 의무를 기꺼이 다하는데 스님은 어떤 입장에 있어야 할까요? 분명히 스님은 신도에게 무엇인가 주어야 합니다. 근거 없는 '업'을 신도에게 지우고 '재'라는 면죄부를 파는 거래는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정법을 전해야 합니다. 무명을 밝혀 번뇌를 없앨 수 있는 그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 룰만 지켜진다면 사찰의 경영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정법을 전하는 스님이 있고 그것을 배우려는 불자가 있는 사찰은 번창일로에 있습니다. 물질의 충족으로는 얻을 수 없는 안심입명을 불법을 통해 얻으려고 하는 이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요자는 넘치는데 공급이 따르지 않는 기현상이 불교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최빈국最貧國중의 하나인 티베트의 불교가 최부국最富國인 미국의 정신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불교야말로 현대인이 안고 있는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대안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는 그 형식에 있어 시대적 상황에 제대로 적용하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타종교에서 배우는 해법

 

개신교의 경우 아무리 작은 교회일지라도 교육하는 공간을 꼭 만듭니다. 일주일이면 하루 이상 교회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새벽 예배를 비롯하여 휴일 예배는 꼭 참석할 뿐 아니라 어린이부터 청소년, 청년부, 장년부 등 연령 대에 맞는 모임을 만들어 예배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집에서도 식사할 때 하는 기도부터 좋은 일, 나쁜 일을 막론하고 기도로서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그 모든 근거는 성경에 있으며 성경의 구절대로 생각하고 실천하려합니다. 이러한 신행의 바탕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경 공부의 결과입니다.

 

매주 한번이상 두세 번을 참석하여 우리말로 된 성경책으로 아주 쉽게 공부를 하기에 일년이면 성경을 알게 될 것이고 십년내로 전도를 할 수 있을 것이며 몇 십 년이 되면 그가 바로 목사와 다름없는 권한을 위임받는 장로가 됩니다.

 

그렇게 공부할 수 있는 신도들의 공간이 교회에는 충분히 마련되어 있습니다. 어디 그 뿐 입니까? 이제는 중규모 이상의 교회를 신축할 때는 신자는 물론이고 마을의 사람들까지 이용할 수 있는 탁아시설, 공부방, PC방 등의 편의시설을 제공하여 교회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올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나라에 들어 올 때부터 의료사업, 교육사업을 통해 사회화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지금은 무료급식을 통한 사회사업에 참여하는 등의 대 사회 활동에 너무나 적극적입니다. 그 모든 것이 시대에 맞는 방법이 아니면 외면당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일지라도 세상에 나올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기독교를 10이라고 보고 불교를 100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기독교는 10 중에서 8이나 9를 세상에 맞추어 쓰고 있지만 불교는 100 중에서 4나 5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할 것입니다.

 

신도들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 배우고 익히는 공간, 세상과 나누는 공간이 절에 있어야 합니다. 대웅전은 엄청 화려하게 장엄을 해 놓지만 여름이면 덥고 겨울이면 추우며 절하고 기도하는 돈을 거두는 공간만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태어나서부터 침대에서 잠자고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책상에서 공부합니다. 가부좌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이들은 법당에 다리를 틀고 앉는 그 자체가 고역입니다. 이러한 젊은이들을 절로 불러들여도 생활습관에 맞지 않는 공간에서 오래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들이 교회에 가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공간에 익숙해지지만 절에 왔을 때는 시작부터 끝까지 불편할 뿐입니다. 마음을 내어서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익숙해지는 노력을 요구하는 것은 한발 뒤진 포교방법입니다.

 

할머니 불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신행공간을 바꾸려하지 않는 것은 왜 입니까? 불상 주변만 잘 장엄하면 절하나 먹고 사는데 큰 지장 없다는 거드름을 아직 부리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그에 하나에서 열까지 맞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제 바꾸어야 합니다. 절도 현대식으로 바꾸고 경전도 한글로 읽고 가르치며 세상이 불교에 바라는데 초점을 맞추어 제공해야 합니다.

 

그 답은 다른 종교를 살펴보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 건축물은 이미 오래 전에 뾰족탑의 외관을 버렸습니다. 절도 기와집이라는 옛집의 모양새를 버려야 합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한글로 가르치고 편한 말로 세상에 말씀을 전했습니다. 절에서도 경전을 한글로 독송하고 쉽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누어야  합니다.

 

찾아오는 이 막지 않고 가는 이 잡지 않는다는 거만한 포교 방식을 버리고 교회처럼 찾아가는 전도를 배워야 합니다. 마당에서 추위와 더위를 참으며 법회를 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환경을 제공해야 합니다.

 

이제 근본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 구태를 과감하게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자들은 부처님을 대신하는 자리에 앉아 정법을 전해야 할 스님들이 부처님을 팔아 사욕을 채우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개인의 욕심을 채워주는 해결사가 아니라 삶의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큰 스승입니다. 불법을 전하는 곳이 아닌 아니라면 이미 절이 아닙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절은 기와집일 수가 없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종교를 물었더니

 

젊은이들에게 종교를 물었습니다. 무교라고 대답하는 사람 중에 많은 이들이 부모님은 불교지만 자신은 종교가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기독교라고 대답하는 이는 모태신앙이라고 얘기합니다.

 

어릴 때부터 가족이 모두 자연스럽게 매주 교회에 다니게 되기에 종교의 선택여지가 없이 기독교를 종교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반면에 불교가 집안의 종교이지만 할머니나 어머니만 절에 다닐 뿐 다른 가족들은 초파일이나 절에 가볼 뿐이니 종교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불교의 가정입니다.

 

이 모든 이유가 사찰이 시대에 맞지 않은 건축물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정기법회가 개설되어 있는 절이라 할지라도 젊은 불자들은 뜻 모를 한자로 된 경을 중얼거려야 하고, 다리를 포개고 앉아 몇 시간을 참아내어야 하는 인고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엄마를 따라 한두 번은 따라 나섰다고 해도 불자가 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법당에 피아노가 있는 절이 가끔 있긴 하지만 찬불가를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절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몇 권 분량의 찬불가가 있지만 정해진 몇 곡 이외에 함께 부를 수 있도록 가르치는 절은 없습니다. 불자 작곡가들이 원력을 내어 지은 찬불가도 무용지물이 되고 있습니다. 

 

절에 가르치고 배우는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찰 건물의 형식이 가르치고 배우는 공간이 없기에 어릴 때부터 신행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적습니다. 장엄한 대웅전은 아이들에게 맞는 환경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다리를 틀고 앉는다는 것 자체가 고문일지도 모릅니다.

 

뜻 모르는 반야심경을 외우도록 강요하는 것도 또 다른 고문일지 모릅니다. 기독교인에게 주기도문은 불자에게는 반야심경 일터인데 주기도문은 읽으면 그냥 내용을 알게 되지만 반야심경의 뜻을 아는 불자들은 얼마나 되나요?  반야심경의 뜻을 물으면 몰라도 암송만 하면 그 공덕이 무량하다면서 배우려는 의지를 꺾어 버립니다.

 

우리의 삶에는 심오한 경지를 깨닫는 것보다 쉽게 행동에 옮길 수 있는 가르침이 더 필요합니다. 스님들이 득도했다는 알 수 없는 한자게송보다 절에 틀어 놓은 법구경 테이프 구절이 힘든 세상을 이겨나가는 데 약이 됩니다.

 

팔만사천법문이 중생의 근기에 맞추기 위한 약방문이라면서 그 처방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약으로 쓰지 못해 불자들은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약방문이 한글로 되어 있다면 마음의 병으로 야위어가는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기사회생할 약으로 쓸 수 있을 것인데도 한자라는 포장지에 싸여 서고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한자로 된 팔만대장경은 CD로 만들고 동판으로 만들어 길이길이 보전하면서도 한글로 만든 대장경은 만들었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절 어디에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한자로 된 글을 한글 음으로 옮겨서 독송하기는 하지만 왜 한글로 풀어놓은 가르침은 외면합니까?

 

한글을 만들 때 언문이라고 소홀하게 대접을 받은 것처럼 한자로 읽어야만 독송 공덕이 있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부처님은 배우고 익혀 실천해야만 공덕이 있다고 금강경에서 누누이 강조하셨건만 가르치지 않으니 배우기 어렵고 배우지 않았으니 익히지도 못해 몇 십 년을 다닌 할머니는 아직 사주팔자를 절에서 묻고 스님께 부적을 달라고 합니다.

 

이제 배우고 익힐 공간을 만듭시다. 그렇게 만든 공간에서 스님들이 정재淨財로 공부한 그 가르침을 신도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부대중이 온전하게 청정한 승가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조상을 천도해서 자손이 무탈하고 사업 잘되는 기도가 영험한 산사에 운집하는 신도가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배우고, 제대로 된 삶의 길을 깨달은 스님에게 공부하기 위해 모이는 불자들이 모이는 절이라야 '이 시대의 정법도량'이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에 맞는 형식으로 지은 정법도량이라야 젊은 불자들이 끝없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절의 형식

 

목탁소리가 시끄럽다는 민원이 구청에, 동사무소에 접수됩니다. 그 옛날 낭만처럼 들리던 교회당 종소리는 이제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동네에 들리는 목탁소리를 사람들이 참아낼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괜찮다고 할지 모르지만 아마도 오래 계속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 절에도 가끔 절에 접해있는 아파트에서 찾아와 목탁소리가 시끄럽다고 항의를 하곤 합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로 그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교회나 절을 지으려고 하면 그렇게 민원이 빗발치는지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시내에서 열리는 야단법석은 바로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됩니다. 다종교 사회에서 내 종교를 위해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손바닥만한 대웅전이라 마당에서 부족한 공간을 해결하는 법회방식을 바꾸어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평상시에는 몇 사람이 참석하는 사십구재나 천도재 정도만 해결하고 초파일이나 큰 법회에는 마당에서 신도를 수용하는 그런 사찰의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나 성당처럼 법회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집회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여름에는 비와 더위, 겨울에는 추위에도 항상 신도들을 좋은 환경에서 신행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앞이니까 더위와 추위도 이겨내야 한다고 강요하는 구태를 버려야 합니다. 이제는 집집마다, 차마다, 직장마다 에어컨이 있는 환경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에게 지금의 사찰환경은 너무 가혹한 것입니다. 매주 전체 불자가 참석해서 정기법회를 열 수 있는 집회공간이 있는 사찰로 구조를 바꾸어야 합니다.

 

신도들만을 위한 공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지금 사찰에 신도들을 위한 공간이 있기는 합니까? 대웅전에서 삼배 올리고 공양간에서 수십 명이 밥을 먹을 수 있는 대중방 이외에 어떤 공간이 있습니까? 다른 종교에는 크고 작은 교육실에 신도회를 위한 사무 공간, 탁아실, 성가연습실, 독서실 등등 신도들이 교회에서 살다시피 할 수 있는 각종 공간에 편의시설까지 풀 서비스를 하고 있는데도 사찰에는 그 어떤 서비스도 제공되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아직 불교신도가 2000만이라는 넋두리 같은 말을 하고 있다면 부처님의 복덕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정말 2000만 명의 불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찰을 지으면서 대웅전 장엄하는 정재를 산 부처를 위해서 지출이 되어야 합니다. 사찰건축을 도시에서도 무조건 목조에 기와지붕으로 지어야 한다는 편견을 버리면 해결방법은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습니다.

 

콘크리트로 지으면서도 목조의 형식을 따르게 되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찰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건축가들이라 할지라도 스님들이 기와집이라는 사찰 형식을 고수한다면 이 시대에 맞는 좋은 사찰을 작품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형식을 타파한 서울 양재동의 능인선원의 경우 현대식 사찰의 훌륭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나 성당의 경우에도 뾰족탑을 포기함으로서 새로운 형식의 성전이자 훌륭한 건축작품이 계속 지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공간이 있어야 이 시대의 절

 

할머니 불교가 아니라 모든 이의 불교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재를 지내는 공간이 아니라 법회와 교육이 열리는 공간으로 탈바꿈해야 합니다. 새로 짓거나 중창되어지는 절에서 동양최대의 불상이니 천불전, 만불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어느 경전에서 부처님의 모습을 크게 만들거나 화려하게 만들면 공덕이 클 것이라 되어 있습니까? 사구게 하나라도 제대로 전하면 그 공덕이 갠지즈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금은보화로 공양하는 공덕보다 많을 것이라 하셨건만 아직도 절을 치장하고 큰 불상이나 많은 불상을 조성하는데 정재를 쏟아 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이 시대의 불교는 그 미래를 어디에 근거를 두고 열어가고 있습니까? 수행자의 처소나 의복, 음식은 비를 가리거나 몸을 가리며 건강을 유지하면 족하지만 가르침을 전하는 방법은 시대에 맞게 개선되어야 합니다.

 

가르침을 전하고 배우며 익히는 공간은 전무하다시피하고 자꾸 불상을 모시고 조성하는 공간만 화려하고 거창하게 만든다면 불교의 미래는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산 부처이며 미래의 부처인 신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승가의 새로운 면모를 만들어나가야 될 때입니다.

 

신도들이 산 부처이며 미래의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무명이라는 껍질을 벗게 하여야 합니다. 그 작업을 우리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 수행의 공간이 강당이며 참선방이며 모임을 위한 각종 장소입니다.

 

그 장소는 옛날의 마루바닥이 아니라 책상이 놓여지고 컴퓨터, 오디오 등 첨단 교육기자재가 설치되어지는 이 시대의 새로운 사찰환경으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마루바닥에서 절 만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명상이나 요가가 아니라 수행으로서의 참선이 이 시대에 맞는 방법으로 교육되고 실수實修되어야 합니다.

 

불교는 우리의 전통과 함께 해왔습니다. 다도, 꽃꽂이, 전통음악 등 이 시대의 문화로 가장 한국적인 모습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교육 또한 포교의 한 방법으로 아주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육을 위한 공간이 만들어진다면 포교사나 강사는 신도들이 충분히 담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간이 없기에 하기 어려운 일상 속의 수행이나 세상을 향한 적극적인 포교, 필요한 공간만 갖추어진다면 명포교사, 명강사로 그 역할을 다할 인재들이 묻혀 있습니다. 해마다 수백 명의 포교사가 지역의 불교교육기관에 배출되지만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며 불교문화를 통해 포교에 기여할 문화포교사들도 그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자들이 부처님의 법을 올바르게 배우고 배운 바를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시급한 것이 그에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맞는 사찰의 전형을 만드는 것이 그 어떤 불사만큼 시급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 불교계에서 목조기와집이나 콘크리트로 만드는 가짜 목조 기와집의 형식만 포기할 수 있다면 이러한 기능을 담은 작은 규모의 포교당에서 대형 사찰까지 자유로운 형식으로 설계하여 포교의 새 시대를 열 수 있습니다. 포교의 새로운 시작을 새 그릇에 담아 열어 보기를 발원합니다.

무설자가 설계한 도심의 작은 절인 원효센터, 부산 남구 대연동에 있다.

원효센터 관련 글 링크 -  blog.daum.net/kahn777/16116065

 

 

새로운 형식의 사찰, 제안 하나

 

도시에는 너른 마당을 가진 절을 짓기가 힘이 듭니다. 땅값이 워낙 비싸기 때문입니다. 확보 가능한 땅에다 3층 이상 집을 지어야 합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마당을 두고 좌우로 요사채를 놓는 전통사찰의 모습에 익숙한 불자들은 한 건물에 사찰의 기능이 다 들어와 있는 사찰을 받아들이기에 어려울지 모릅니다.

 

우선 아랫층에는 주차장을 가능한 많이 확보해야 합니다. 주차장이 없이는 1가구 1차량의 시대에 맞는 포교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차장을 만들고 난 뒤에는 진입공간을 독특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일주문의 개념입니다. 차안과 피안을 나누면서 하나로 만드는 공간이죠. 저는 진입공간을 '불이의 장不二의 場'이라 이름을 짓습니다.

 

중간층은 요사채 영역입니다. 종무소와 공양간, 스님의 처소, 대중방 등이 들어갑니다. 이 층에는 다목적 공간이 들어가야 합니다. 공양도 하고 차도 마시며 문화 강좌도 할 수 있는 홀을 중심으로 다른 실들이 배치됩니다. 신도들이 함께 어우러져 만남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입니다. '바라밀의 장波羅密의 場'이라 칭합니다.

 

상부층은 법당이 들어갑니다. 기존 전통사찰의 전각은 횡으로 긴 평면을 가지고 있어 공간 활용에 있어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에는 불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종으로 긴 형태로 바꾸면 같은 면적으로도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1평이면 약 2사람을 수용할 수 있으니 30평의 공간이 있으면 60명 정도의 법회를 할 수가 있습니다. 50평이면 100명은 함께 법회를 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정혜의 장定慧의 場'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바라밀의 장을 두개층으로 나눌 수 있으면 동적 공간과 정적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2층은 신도들의 공간으로 쓰고 3층은 스님의 공간으로 확보를 합니다. 신도들의 공간은 공양간과 다각실 및 대중방을 넣어 다소 자유로운 공간으로 만듭니다. 스님의 공간은 침실과 함께 다목적 공간 및 도서실 등을 배치하여 수행의 공간으로 구성하게 됩니다.

 

이제 층으로 나누어진 공간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이 장치는 바로 계단실입니다. 흔히 계단은 수직으로만 생각하지만 길이 방향으로 펼치면 아주 극적인 공간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마치 산사의 경사진 각 공간을 연결하는 계단처럼 만들어내면 아주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산에 접한 대지일 때는 2층에 마당을 만들 수가 있고 도심에서는 옥상을 이용하여 외부공간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글을 통해 설명이 충분하지 않겠지만 신도들의 공간인 '바라밀의 장'을 제대로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 제가 제안하는 내용 중에서는 가장 중요합니다.

 

건축사라는 직업을 가진 저로서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고민해 왔습니다. 물질이 우선인 이 시대에 불교가 다해야 할 역할은 정말 중차대하다할 것입니다. 포교란 단순히 신도를 모은다는 것을 뛰어넘어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감로수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측면으로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매머드 규모의 대형 사찰을 만들어 불법을 알리는 것만이 상책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옹달샘 같은 작은 포교당이 마을 곳곳에 들어서 생활의 터전에서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그 포교당의 형식을 이처럼 기본적인 틀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자말자 들르고, 출퇴근하면서 잠깐 시간을 내어 들를 수 있는 이 시대의 작은 절이 많아진다면 포교의 최일선에서 젊은 불교, 이 시대에 맞는 불교, 감로수 같은 불교로  바꾸어 종교간의 경쟁력을 확보하는데도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건축사의 역할

 

건축사는 건축주를 대신해서 집을 짓는 모든 과정을 총괄하는 역할을 합니다. 건축주는 집을 짓기 위한 대지와 공사비를 제공하고 건축사는 건축주로부터 그 권한을 위임받아서 준공할 때까지 책임을 다할 수 있습니다.

 

건축주가 건축사를 선정하는데 심사숙고를 해야 하는 것은 나를 대신하여 건축사가 집 짓는 일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건축주가 집을 짓는 일에 밝다면 손발을 대신할 사람만 있으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건축주 본인처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건축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절은 예사로운 집이 아닙니다. 더구나 일반적인 기와집이 아닌 제가 제안하는 내용이 담기는 새로운 형식의 절이라면 신행생활이 돈독한 불자임은 물론이요 건축에도 아주 뛰어난 능력이 있는 이라야 할 것입니다. 돈독한 신행생활을 바탕으로 스님의 입장에서, 신도의 입장에서 서로 필요한 사항을 알아야 할 것이며 절에 대한 오랜 전통을 이어서 새로운 형식으로 담아낼 수 있는 답을 찾아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집은 한 번 지어지면 다시 지을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절이란 그 집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성스러운 공간의 분위기를 잘 유지해야하기에 설계자로부터 시공자, 내부공간의 장엄까지가 일관성 있게 진행될 수 있도록 선정되어야 합니다. 그 중에 설계자의 요건은 앞에서 말한 자격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불사의 관계자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스님을 비롯한 불사관계자가 제시하는 절을 짓는데 필요한 의견을 충분히 받아들여서 전체적인 구성을 단계로 나누어 보고를 해야 합니다. 전체적인 예산은 향후 증축 및 관리를 위한 부분까지 반영하여 설계를 진행하여야 합니다.

 

지금은 제한된 예산으로 1단계를 진행하고 추후 예산이 확보되는 대로 최종단계로 완성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한정된 예산에 맞추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집을 완성하는 데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돈에 맞추어 그 만큼의 집을 짓게 되면 나중에 예산이 확보되더라도 더 돈을 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장엄하는 부분은 얼마든지 나누어서 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뼈대는 한 번 손을 대어버리면 더 이상 고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최종적인 결과까지 설계를 진행하여 단계별로 나누어 집을 지어야 최종결과물의 완성도가 보장될 수 있습니다.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백년을 두고 아직도 짓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래 지을 수는 없겠지만 예산이 한정되어 있다면 단계를 나누어 진행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건축가는 그 모든 과정을 염두에 두고 진행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불자이면서 유능한 건축사가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상을 만드는 이를 불모라고 하듯이 불사를 수행하는 건축사는 절을 짓는 장인으로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 다른 조건은 변할 수 없지만 건축사의 선정은 임의로 할 수 있기에 심사숙고하여 이 모든 능력을 구비한 사람이 선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간혹 목조가 아닌 자유로운 형식의 절이 지어지고 있지만 앞에서 제안한 내용이 반영된 절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프로그램이 없었을 뿐 아니라 있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반영하여 설계할 건축사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절을 짓고자 하는 분이 있으시다면 꼭 제대로 된 건축사를 찾아서 앞에서 제안한 내용을 반영하여 진행하면 좋겠습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불교의 역할이 새로운 절의 형식을 통해 구현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 간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불교의 미래가 불자들의 공간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새로운 형식의 사찰에서 희망차게 열리게 될 것이라 감히 제안해 봅니다.       

 

 

무설자 합장 

 

 

무설자는 건축사로서 도반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집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어서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건축설계를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어쩌다 수필가로 등단을 하여 건축과 차생활에 대한 소소한 생각을 글로 풀어쓰면서 세상과 나눕니다.

차는 우리의 삶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이만한 매개체가 없다는 마음으로 다반사로 차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집을 지으려고 준비하는 분들이나 이 글에서 궁금한 점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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