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이야기/사찰건축을 위한 제언

우리 동네에 이런 절이 있었으면

무설자 2005. 11. 14.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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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 이런 절이 있었으면

 

                                                                                                     김 정 관

   


  도반건축에서 제안하는 작은  절, 일층에는 공양간, 다실, 원주실이 있어 불자들의 강좌와 대화를 담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실내계단을 통해 2층 법당으로 올라간다. 냉난방시설과 샤워실까지 내부에 갖춰진 100명 정도가 법회를 볼 수 있는 작은 절이다. 

 


이제 절은 세상을 향해 열려있어야 합니다. 산중에 숨어있었던 옛 절은 수행자를 품고 세상에서 도망쳐 자신을 숨기려는 사람을 안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절은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 빛이 어둠을 밝히듯 도시 생활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의 삶을 다독일 수 있어야 합니다.

 

절을 표현하면서 드는 사람 막지 않고 나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절은 늘 열려 있어서 누구라도 기꺼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의미로 생각해 봅니다. 절을 찾아 드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는 답답한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절에 들었을 때의 힘든 상황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충족할 수 있는 곳이라야 하겠지요. 절을 도피처로 찾았지만 해소처가 되고 마지막에는 해결처가 되어야 합니다.

 

산중의 절이 도피처에 가깝다면 동네에 있는 절은 해소처나 해결처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절은 집 가까이에 있어서 불자들이 일상 신행을 도와주어서 집에서 생긴 답답함을 풀어나가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회생활은 경쟁의 연속이라 매일 받는 스트레스를 그때그때 녹여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행복의 근원은 일상을 잘 꾸려나가는 데서 비롯된다는 걸 알게 하는 곳으로 절을 찾을 수 있게 되어야만 종교 경쟁시대를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이런 취지에서 불자들이 바라는 절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작은 절이 되어야 합니다.

 

고래등같은 팔작지붕기와집에다 화려한 단청으로 장엄한 절은 우리 동네 절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승복차림의 반승반속인이 텃세를 하는 그런 위세를 떠는 절이 아니라 자비로운 미소와 봄볕같이 온화한 표정으로 반기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좋겠습니다. 누구든 부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싶은 사람이 올 수 있으며 언제든 부처님을 찾고 싶을 때 편하게 올 수 있는 곳이라면 큰 절이 아니라 작은 절이라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편안한 절이어야 합니다.

 

문턱이 낮아서 쉽게 들어올 수 있어야 하며 주인이 위에 있고 객이 아래에 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 누구든 제 집처럼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은 상단에 앉아 계시지만 언제든 아래로 내려올 듯이 온화한 표정을 짓고 계십니다. 절에 오래 다녔다고 자신의 위치를 따지며 거들먹거리는 태도와 불손한 말씨로 스님들의 법납인양 절이력을 따지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셋째는 마음을 쉬어갈 수 있는 절이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물질을 추구하고 재물이 부족한 이는 많이 가진 사람에게 머리를 숙입니다. 하지만 절에서는 마음이 불편한 사람은 마음을 달래고, 재물이 부족해서 세상살이가 힘든 사람이 마음 공부로 견뎌낼 수 있는 그런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습니다. 무소유는 재물을 가지지 말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소유라는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삶임을 알게 되는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넷째는 수행 하는 절이어야 할 것입니다.

 

위로는 부처님을 모시고 주변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들로 가득한 도량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엎드려서 복만을 구하는 이, 애쓰지 않고 편안함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발을 붙이지 못하는 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신을 잘 다스려 세상과 다투기보다 나누고 베푸는 삶을 실천할 수 있는 수행을 하는 곳이면 좋겠습니다.

 

다섯째는 새벽 시간을 가지는 절이었으면 합니다.

 

밤 시간을 줄이고 새벽 시간을 쓰는 삶을 사는 이들은 청정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루의 시작을 집 가까이의 절에서 예불과 독경으로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처님 앞에서 발원을 통해 행복의 의미가 하루를 얼마나 열심히 사느냐에 달려 있음을 알아갈 것입니다.

 

여섯째는 낮에도, 저녁에도 찾을 수 있는 절을 찾아 봅니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환갑이 되기 전에 정년을 맞이 하는 사람이 자꾸 늘어납니다. 수명은 늘어났지만 은퇴 이후에 할 일을 찾지 못해 무료한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는 게 현대인의 삶입니다. 무엇을 해도 그 의미를 찾아내기 힘들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찾고 싶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수행하고 봉사를 통해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절이 필요합니다.

 

일곱째는 퇴근 시간에 들러서 하루를 돌아볼 수 있는 절이면 좋겠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생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터에서 하루를 보내지만 퇴근 후의 삶이 두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돌아가도 반겨주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 정해진 일을 끝내고나도 그 일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절에 들러 일의 의미를 찾는 공부를 하면서 하루를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여덟째, 가끔 정해진 날에 밤을 새워 수행하는 절도 필요합니다.

 

함께 모여 수행을 복 돋울 수 있는 공부를 하기 위함입니다. 매주든 매월이든 정해진 날에 함께 모여 혼자 하는 공부를 점검하기도 하고 서로의 공부를 서로 나누는 자리를 가지고 싶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스승을 모시기도 하고 서로가 스승이 되는 자리도 있습니다. 그렇게 모여 공부를 점검하다보면 내가 앞 선 것도, 부족한 것도 보고 또 서로 봐 주기도 할 것입니다. 밤새워 수행할 수 있는 절이 우리 동네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도시는 사람이 많이 모여 살다보니 다툼도 많습니다. 도시인들은 한정된 것을 서로 더 갖기 위해 다툽니다. 어느 것이 바른 것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가지면 그만 이라는 것으로 따지며 끊임없이 다투고 있습니다.

 

다툼 뒤의 성취로 얻은 결과물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그것이 행복인지 아닌지 알지도 못한 채 다만 내 것으로 만드는 데만 골몰해 있습니다. 그것이 행복인지 모르므로 마침내 행복인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날에 그는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가 찾는 것은 행복이었지만 그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이 시간에 이르렀음이 후회스러워 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찾는 행복은 물질을 소유하거나 명예를 높이는 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을 살피는 일이 필요하게 되는 날, 그는 집 가까이에 있는 절에서 새벽을 맞이하고 아침을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서 저녁 이후의 시간을 돌아보며 마무리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나를 알면서 시작하는 하루는 어떤 일이 되어도,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좋을 것입니다.

 

세월을 모아서 만들었던 재물과 명예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재물과 명예로 누구를 행복하게 했습니까? 재물은 끊임없는 다툼을 만들었고 명예는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하였을 뿐입니다. 진정한 나를 찾아서 그 나를 통해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재물이든 명예든 그것으로 나도, 다른 이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 모르면서 살아가는 삶이란 허깨비요 껍데기가 만드는 삶이니 얼마나 허망한 것입니까? 이름도 지워버리고 주민등록번호도 지워버리고, 부모도 자식도 떼어내고 남은 나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까? 얼마라는 재물도, 높다는 그 명예도 영원히 내게 남는 것이 아닌 바에야 나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삶의 결과치란 허수아비에 걸쳐놓은 헌 옷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나는 누구인가? 이 시대의 절은 이 명제를 찾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출가를 단행했던 그 이유가 우리가 절을 찾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 여기에 와서 나를 찾는 수행을 하는 그런 작은 도량이 우리 절입니다. (2005, 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