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주택은 아파트가 기준이 된다. 최근에 지어진 단독주택을 잡지 등의 매체를 통해 보아도 욕실은 아파트의 그것과 다름없다. 욕조나 샤워기, 세면대, 변기가 한 공간에 들어 있는 욕실은 어느 집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아파트 현관 앞에 있는 공용 욕실과 안방 전용 욕실로 다른 공간은 평형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지만 욕실은 거의 비슷하다. 원룸에 가도, 중대형 아파트에 가도 욕실만 큰 차이가 없다. 심지어 단독주택에도 다르지 않아서 법으로 욕실을 규정하고 있나 싶을 정도이다.
아파트는 상품이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단독주택은 건축주가 바라는 대로 달리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단독주택이나 상가주택 등 주거 건축물을 설계해 오면서 욕실을 다양하게 변화를 주며 작업해 오고 있다. 건축주의 요구에 따르기도 하지만 설계자로서 내가 제안한 결과는 그냥 좋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만족하다고 한다.
왜 욕실은 변하지 않는 걸까?
아파트 욕실의 변화는 크기에서 1.8m × 2.4(2.1) m로 달라진 건 없다. 다만 안방 욕실 주변은 점점 늘어나 파우더나 수납의 기능이 추가되고 마감재나 욕실 구성품이 고급화되고 있다. 욕조를 설치하지 않고 샤워기로 대체되는 정도로 밖에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해야겠다.
그런데 의아한 건 샤워부스에 유리 칸막이를 해서 물 쓰는 공간을 구분하고 나머지 공간은 건식으로 쓰는 집이 많다. 그러면 아예 변기와 세면대를 별도의 공간으로 분리하면 안 되는 것일까? 습식 공간에는 욕조와 샤워 기를 함께 두면 다양한 목욕 스타일을 수용할 수 있을 텐데.
만약 욕조나 샤워기, 변기, 파우더를 겸한 세면대를 영역으로 나눌 수 있으면 안방에 따로 욕실을 둘 필요가 있을까 싶다. 집안 청소 중에 가장 힘든 곳이 욕실일 텐데 한 곳도 힘이 부치는데 두 곳이나 있다니. 욕실을 기능에 따라 구분해서 설치하면 식구가 많아도 한 사람은 샤워, 다른 사람은 변기를 쓰고 양치질도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욕실을 바꿔 보면
주거 생활에서 예전에 비해 확연하게 바뀌어진 부분은 좌식에서 입식이 아닐까 싶다. 아직도 침대나 소파를 쓰지 않고 좌식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집도 적지 않다. 하지만 좌식 생활로 성장기를 보냈던 세대 이외에는 입식으로 주거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욕실은 얼마나 바뀌었는지 살펴보면 기본 구성에서는 크게 변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집 전체 면적에서 욕실이 차지하는 부분이 얼마 되지 않는데 왜 바꿔지지 않는 것일까? 욕실을 두 개나 두고 있지만 실제로는 공용욕실만 쓰는 집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차라리 욕실을 하나만 두고 면적을 더 줘서 기능을 분화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몸을 씻는 욕실, 몸을 단장하고 양치질을 하는 파우더룸, 용변을 보는 화장실로 구분하면 어떨까? 아마도 3~4인 식구가 사는 집에서 동시 사용을 고려하더라도 크게 불편함이 없을 것이다. 습식 공간이 욕실에만 한정되니 청소에 대한 부담도 줄고 편의성은 커지게 된다.
호텔 분위기의 파우더룸이 우리집에도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아이들이 성장해서 대학생이 되어 따로 살게 되면 대부분 50대부터는 부부만 살게 된다. 둘이 사는 집에서 과연 욕실이 두 개나 필요할까? 요즘 추세에 맞춰 부부가 따로 방을 쓰더라도 욕실을 하나로 같이 쓰면 안방에 대한 위화감도 줄게 될 것이다.
삼대가 사는 동녘골 주택 욕실은
어머니를 모신 건축주와 남매인 아이 둘로 삼대가 살 집이라 보통의 욕실 하나로 쓰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크지 않은 집에 욕실을 두 개 두는 건 공간의 낭비라 보았다. 그래서 샤워기와 변기를 둔 습식 공간과 파우더 실로 구분해서 제안했다.
설계자의 제안에 건축주는 아예 변기까지 별도로 나누었으면 하는 바람을 얘기했다. 평면 구성상 세 군데로 기능을 분화하는 건 어렵다고 답을 드렸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해결 방안이 없을까 숙고하다 방의 위치를 바꾸니 건축주의 바람이 뜻을 이루게 되었다.
큰방이 현관 가까운 곳으로 위치하니 복도가 안으로 깊어져 욕실 공간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외기에 접하는 쪽으로 욕실, 가운데에 파우더룸, 안쪽으로 화장실이 배치되었다. 씻고, 얼굴을 꾸미고, 용변을 보는 데 걸리는 시간이 삼대가 다 다를 것이다. 만약에 기본 욕실만 하나를 두었다면 식구들 간의 갈등이 매일 일어날 수 있다.
한 사람이 씻고 있는데 용변을 봐야 할 사람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문제 때문에 욕실을 두 개 둔다고 하지만 이 또한 공간의 낭비라고 본다. 기능을 분화시킨 욕실은 하나로도 쾌적하면서 여유 있게 쓸 수 있게 되었다.
설계 과정은 집을 짓고 난 뒤에 아쉬워하지 않도록 생활의 편의를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 욕실과 화장실은 생리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아주 민감한 공간이다. 기존 욕실 하나만 두었다면 식구들 간에 소소한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었겠지만 이제 동녘길 주택은 웃음소리가 넘치는 공간이 되었다.
파우더룸은 건축주가 화장을 하면서 막내의 용변을 챙기거나 어머니가 연세가 더 들면 목욕도 돌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집을 지어서 살면 우리 식구가 행복할 수 있도록 어느 한 곳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쓰임새에 마음을 써서 설계를 해야 한다. 그 한 곳인 욕실이 이렇게 만들어질 것을 상상하니 여기에서 들리는 웃음소리가 내 귀에 들려오는 듯 하다.
무 설 자
무설자(김정관)는 건축사로서 도반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집은 만들어서 팔고 사는 대상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지어서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건축설계를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
어쩌다 수필가로 등단하여 건축과 차생활에 대한 소소한 생각을 글로 풀어 쓰면서 세상과 나눕니다.
차는 우리의 삶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이만한 매개체가 없다는 마음으로 다반사의 차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김해, 양산 지역에 단독주택과 상가주택을 여러 채 설계 했으며 부산다운건축상, BJEFZ건축상을 수상했습니다.
집을 지으려고 준비하는 분들이나 이 글에서 궁금한 점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메일:kahn777@hanmail.net
전화:051-626-6261
'집 이야기 > 도반에서 지은 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싱글맘이 짓는 동녘길 단독주택 1 - 단독주택을 꼭 지으려고 하는 분께 (6) | 2024.01.11 |
---|---|
싱글맘이 짓는 동녘길 단독주택 10-집만큼 작은 마당에 담을 넉넉한 행복 (4) | 2024.01.11 |
싱글맘이 짓는 동녘길 단독주택 8 - 넓이보다 깊은 공간의 거실과 주방 (5) | 2023.12.19 |
싱글맘이 짓는 동녘길 단독주택 7 - 韓室한실까지 갖춘 집 (2) | 2023.11.09 |
싱글맘이 짓는 동녘길 단독주택 6 -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는 집 (0) | 2023.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