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이야기/행복한 삶을 담는 집 이야기

집에 집이 없어야 하는 이유

무설자 2017. 6. 9.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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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설자의 행복한 삶을 위한 집 이야기14

  집에 집이 없어야 하는 이유

 

자연은 견성정(見性情)의 대상이다. 그 대상 앞에서 집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할까? 많은 시들은 집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자연의 감각적인 대상들을 즐겨 노래한다.

 

“빈창에 눈보라 치고

촛불 그물거리는 밤

달빛에 걸러진 솔 그림자

지붕 머리에 어른댄다

밤 깊어 알괘라!

산바람 지나가는 줄

담 너머 서석 거리는

으스스 댓잎소리... “ (이우, 눈보라 치는 밤에) 

 

놀랍게도 시 속에는 집이 없다. 시인도 자신의 집에 살았으련만, 그의 집은 온데간데없다. 존재는 있으되 그 모습은 온전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있다면 창이나 툇마루나 정자, 지붕만이 정경 속에 묻혀 있을 뿐 집이나 바람, 구름, 달과 새와 함께 배경으로 존재한다. 집은 그들과 하나다. 시인에게 집 자체는 대상이 아니었나 보다.

                                                                                   - 집, 감각의 제국/김억중 (미디어대전 2016.6.20.) 

 

필자 설계 경남 양산 심한재  계획안

요즘 집에 대한 관심을 보자니 마치 단독주택이 대세인 것처럼 보인다. 인터넷에 단독주택에 관한 정보가 넘쳐나고 방송 프로그램도 단독주택에 관한 내용이 인기다. 하지만 정보의 대부분은 단독주택을 분양한다는 광고 일색이거나 방송도 집을 흥미거리로 내용을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단독주택 분양광고를 보자니 그림처럼 예쁘긴 하지만 꼭 같은 모양으로 열 채, 스무 채씩 찍어내듯이 지어서 파는 집이라면 굳이 단독주택에서 사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집’이라고 하면 추상적인데 ‘우리집’이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딸, 아들, 가족이라는 말에는 항상 ‘우리’가 함께 따라붙는다. 한 집에 사는 사람들은 ‘나’라는 개인적인 입장보다 ‘우리’라는 연대의식 속에 살기 때문일 것이다.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이러한 ‘우리’라는 정서가 무너지고 있다.

‘집’이라고 하면 추상적인데 ‘우리집’이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에 살았던 시절에는 삼대가 한 집에 사는 게 보통이었다. 어느 때부터 아파트에 사는 것이 일반화되면서 부부 중심의 평면 얼개가 ‘우리’라는 연대감連帶感을 무너뜨린 게 아닌가 싶다. 아이들은 침대와 작은 옷장, 책상과 함께 작은 방에 감금되다시피 살게 되고, 삼대三代가 한 집에 살기 어렵게 되니 조손 관계祖孫關係가 끊어지다시피 되고 있지 않는가?

 

사람이 집을 만들지만 그 집이 다시 사람의 삶을 바꾸어놓는다는 처칠의 말씀을 생각해 본다. 아파트라는 집이 삼대가 어우러져 살았던 아름다웠던 우리네 삶의 구조를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자마자 원룸을 구해 부모 곁을 떠나버리니 삼대는커녕 이대二代도 포용하지 못하는 집이 아파트이다.

 

그런 아파트가 싫다며 단독주택으로 터전을 옮겨 살자는 움직임이 드디어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느낌이 감지된다. 그렇지만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만 짓는다고 해서 ‘우리 가족’의 연대감이 살아날 수 있을까? 이미 익숙해져 있는 아파트 평면을 닮은 단독주택이라면 그 집에서 ‘우리’가 다시 살아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우 시인의 시 속에는 집이 없다고 했듯이 우리가 사는 집에는 집이 없어야 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외관만 예쁜 집이라면 겉치장을 꾸미는데 치중하게 될 것이다. 근사한 외관을 갖춘 집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자랑거리가 될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삶을 제대로 담아내는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우리 식구’의 삶이 온전하게 담길 수 있는 ‘우리집’이라면 겉모양보다 집의 얼개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우리 식구’의 삶이 온전하게 담길 수 있는 ‘우리집’이라면
겉모양보다 쓰임새를 담은 집의 얼개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우리집’이라는 말로 집의 본질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정경이 어떠해야 하며, 작은 마당을 두고 그쪽으로 나있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상상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붕 처마선에 걸린 하늘가에 흐르는 구름도 떠올려보고, 비 오는 날에 데크로 난 거실 큰 문을 열고 빗소리도 듣는 정취를 그려보기도 해봐야 할 것이다. 바람, 구름, 달과 새와 함께 집도 ‘우리’가 살아가는 배경으로 존재해야 할 터이다. 집 뒤의 산이나 앞으로 바라보이는 강이 있다면 강바람이 집을 지나 산으로 가는지도 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손주들이 ‘우리집’을 좋아하게 될지도 생각해봐야 하리라. 그 이전에 내 며느리나 사위가 편히 머무르다 갈 수 있을지, 말이라도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이 좋다고 할 수 있을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집’이라면 마땅히 ‘우리 식구’들이 다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겠냐고 해야 할 것이어야 하므로.

 

‘우리집’은 ‘우리 식구’들처럼 수수한 모습이면 그만일 터이다. 그렇지만 ‘우리집’이라면 ‘우리 식구’처럼 서로 위하는 마음이 집에 사는 일상에서 묻어나야 하리라. ‘우리집’은 ‘우리 식구’들을 부담스럽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위압적이거나 허세가 묻어나서도 안 될 것이다.

 

필자 설계 경남 양산 심한재-'우리 식구'를 위한 '우리집'으로 지었다
‘우리집’은 ‘우리 식구’들처럼 수수한 모습이면 그만이니
우리라는 말처럼 서로 위하는 마음이 집에 사는 일상에서 묻어나야 하리라


  ‘우리집’은 ‘우리 식구’에게는 더없이 편안한 장소라서 밖으로 나갔다가 일을 보는 대로 서둘러 돌아오고 싶어야 하겠다. ‘우리집’은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2017. 6. 9)

 

 

 

김 정 관

 

 

무설자는 건축사로서 도반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집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어서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건축설계를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어쩌다 수필가로 등단을 하여 건축과 차생활에 대한 소소한 생각을 글로 풀어쓰면서 세상과 나눕니다.

차는 우리의 삶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이만한 매개체가 없다는 마음으로 다반사로 차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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