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에세이 고찰순례

정족산 전등사 순례기1

무설자 2009. 8. 30.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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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설자의 에세이 고찰순례기 0908

정족산鼎足山 전등사傳燈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로 중창기문(重創記文)에는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절이라 합니다. 1266년(원종 7)에 중창된 이래 3, 4차례의 중수가 있었다고 하는 기록에 의하면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확실하게 단정짓기는 어렵습니다.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했으나 1282년(충렬왕 8)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1337(충숙왕 6), 1341년(충혜왕 2)에 각각 중수되었다고 하나 당시 전등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1605(선조 38), 1614년(광해군 6)에 일어난 2차례의 화재로 절의 건물들은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 4월부터 지경(志敬)이 중심이 되어 재건하기 시작해 7년 만인 1621년 2월에 완성되었습니다.

1678년(숙종 4)에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건립되면서 왕조실록을 지키는 사찰로 왕실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고장본(史庫藏本)은 1909년 서울로 옮겨져 조선총독부 분실(分室)에 보관되었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1707년에는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별관을 또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했습니다. 그뒤에도 1749, 1839, 1855, 1871, 1876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래까지 대규모의 중수 불사(佛事)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때 대조루(對潮樓)를 비롯해 양곡을 보관하는 정족창(鼎足倉)·석량고(石糧庫) 등의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이 되었습니. 1912년 일제강점기 때 강화·개성 등 6개군에 있는 34개 사찰을 관리하는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 승격되었습니다. 또한 이

뒤편에 있는 정족산의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여 신성시되는 점이 주목됩니다. 경내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원건축인 대웅전(보물 제178호)·약사전(보물 제179호)을 비롯해 명부전·삼성각·향로각·적묵당·강설당·범종각 등이 있습니다. 중요문화재로는 중국 북송시대의 범종(보물 제393호)과 전등사의 말사인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된 조선시대의 법화경판(1544)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경판은 6·25전쟁 때 파주에 있었던 모부대에서 1매를 가져가 현재 104매만 남아 있습니다. 그밖에 거대한 청동수조(靑銅水槽)와 대웅전에서 사용했던 작은 옥등 등이 있습니다. - 다음백과사전

 

 

부산에서 강화도는 멀기도 합니다

오전 6시가 조금 넘어 출발하여 다섯 시간이 넘어서 강화도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우선 고픈 배를 달래줘야 하기에 대선정이라고 하는 이름난 음식점을 찾았습니다

 

 

사진이 없이 못 위의 정자에서 점심을 먹었다고 하면 운치가 있을텐데 그림처럼 분위기는 별롭니다

그런데 저 안에 들어가니 더운 날씨에도 밥을 먹기에는 제법 쾌적했습니다

메뉴는 시래기 비빔밥인데 고픈 배 때문인지 먹을만 했습니다만 추천은 망설일 듯...

 

 

전등사 초입의 찻집입니다

삼랑성 성문을 지나서 만나는 편안한 찻집의 분위기 들어가보고싶지만 단체로 이동하는 중이라...

 

 

 

전등사로 누각 아래를 지나 대웅전이 있는 마당에 진입하는 방식입니다

급한 경사를 올라서 만나는 누각 아래로 머리를 숙이듯 마음도 낮춰 들어갑니다

머리를 숙이면 부딪힐 일이 적다고 하지요

 

 

 

누 아래를 지나 앞 마당에 들어서면서 보이는 대웅전입니다

올려다보는 진입하면서 높은 축대 위에 앉은 절의 젤 중요한 건물의 격을 높여 보게됩니다

토요일 오후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절을 찾았습니다

 

 

축대는 자연석을 막쌓기로 만들었고 대웅전의 기둥도 최소한으로 가공하여 친근감을 줍니다

자연을 닮은 집, 가능한 자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면서 짓는 것이 우리 집을 짓는 원칙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짓는 절집들은 이런 원칙을 아예 염두에 두지 않고 짓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고찰을 순례하면서 주요전각의 공포를 비교해보는 재미를 붙여 보면 흥미롭습니다

전등사 대웅전은 건물 모서리 상부위 귀공포 위에 추녀를 지고 있는듯 붙은 인물상이 포인트입니다

큰 사진으로 보고 나중에 확대 사진으로 보도록 하지요 

 

 

 

 

 

 

네 모서리기둥 윗부분에는 사람 모습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옵니다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고 추녀를 받치는 모습을 조각하였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3곳의 처마 밑에서는 두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에 있는 한 귀퉁이의 것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지요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축대 위가 상당히 여유롭습니다

비교적 여유가 있는 마당의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님의 흰고무신은 댓돌 위에 있고 신도들의 신발은 그 아래에 있네요^^ 

 

 

대웅전에서 바라보는 누각과 그 아래로 들어오는 공간을 봅니다

누각은 주로 대중을 모아서 행사를 하거나 공부를 하는 강당으로 쓰이지요

아주 소박한 팔작지붕입니다

 

 

 

 


중창불사가 아주 활발하고 토요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는 활기넘치는 절입니다

이 많은 대중들이 전등사를 찾아오는데 이들을 위한 배려가 충분하게 이루어지고 있을까요?

절 어디에도 절을 안내하는 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 조선실록 사고가 안치되었던 절

이 두가지 사실 만으로도 자원봉사자든 사중 소속이든 안내하는 이가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등사가 가지는 이 시대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2편으로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