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세상 이야기

꽃은 제 스스로 피는데

무설자 2006. 4. 1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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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출강한지도 벌써 10년이 되어갑니다. 실무를 통해 얻어진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어렵게 느껴집니다. 경기가 좋지 않다보니 나의 모습이 학생들의 미래일 것이라 생각하면 이 길을 권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건축가의 길은 공부를 하는 과정부터 매우 힘이 듭니다. 학기 중에는 거의 매일 밤을 새다시피 하며 공부를 해야 하는데 졸업 후의 실무를 익히는 과정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건축을 하겠다고 이 전공을 선택하는 것을 보면 대견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지를 먼저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가야할 길을 저의 경험과 큰 건축가의 경우를 통해 목표를 분명히 하도록 합니다. 미리 지도를 보고 가야할 목적지의 사전지식을 가지고 가는 여행과 그냥 물어물어 가는 그것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학기 초에는 큰 목표에 대한 얘기를 하고 학기 중에는 매주 작은 성과에 대한 중요성을 일러 줍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기를 시작할 때는 큰마음을 내어서 호기를 부리며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학기 중에 많은 학생들이 게으름을 부리거나 큰 목표에 대한 확신을 놓쳐버립니다. 학기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강의 때마다 목표에 대한 인식을 놓치지 않도록 당부합니다.

 

처음 가는 낯선 길이기에 조금만 힘들어도 자신이 가고자 하는 목표에 대해 불확실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 고비를 잘 넘기지 못하면 문만 두드리다 문 안으로 들어와 보지도 못하고 돌아서버리게 됩니다. 일단 들어오게 되면 의외로 잘 해 나갈 뿐 아니라 기대 이상의 결과를 만드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처음의 과정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이들의 잠재능력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등학교 과정까지 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대학에 와서 스스로 열심히 하게 되면서 지난 시간에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는 것을 봅니다.

 

아마 고등학교 이전의 교과과정이 문제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무조건 붙들어 놓고 공부할 것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과정을 거치게 하였다면 많은 학생들이 좀 더 나은 기회를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을 믿으려고 애씁니다. 건축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친구들이 한 학년을 마치고 나면 건축에 푹 빠져있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제가 탄복을 하게 됩니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자신이 만든 영화 ‘벤허’ 시사회장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여, 정말 제가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까?’


저도 한 학년을 마친 학생들을 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린 적이 있습니다.


‘정말 이 아이들이 학기 시작할 때 그 아이들인가?’


내가 학생들에게 거는 기대, 그만큼 그들은 바뀌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목표를 파악할 때까지 끊임없이 목표를 제시해야 하고 그에 대한 확신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그들이 목표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 시작하고 하면 된다는 의지를 드러내기 시작하면 제가 할 일이 줄어들게 됩니다.


 

 

제 아이도 저와 같은 길을 걷기 위해 건축학과에 재학 중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세상에 어떤 일보다 귀한 일입니다. 사실 저는 사회생활에는 충실했지만 가정에는 부족한 것이 많은 가장입니다.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가지지 못했고 시간을 나누는 것으로도 인색했습니다. 성격도 너그럽지 못해 아내에게는 딱딱한 지아비였고 아이에게는 엄한 아버지였습니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가 아비의 일을 선택하겠다고 했을 때 저는 의아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초에 제게 진로를 밝히는 딸에게 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동의를 표했을 뿐입니다. 그 아이가 벌써 3학년입니다. 힘든 공부인데도 내색을 하지 않고 열심히 임하고 있습니다.

 

벌써 건축이 무엇인지 아는 표를 내가면서 저의 일을 돕는다고 수업 틈틈이 사무실에 와서 일을 돕기도 합니다. 육체적으로도 이제는 성인이지만 정신적으로도 철이 많이 들었습니다. 제 공부도 바쁠 텐데 일 돕기를 청하면 밤을 새가면서 맡은 일을 잘 처리합니다.

 

이제는 스스로 하는 의지가 분명해서 격려와 칭찬만 해주면 될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저의 꾸지람에 눈물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때의 일을 고마워하는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아이와 같은 길을 가면 평생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니 그보다 더 좋을 게 있을까요.

 

저와 닮은 모습으로 커가는 것이 외양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렇게 되는 것이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이 녀석이 정말 저의 자식이냐고 스스로 되물을 날을 기다려 봅니다. 낳는 건 부모의 몫이지만 크는 건 아이가 스스로 하는 일이라 믿고 몇 발자국 물러서서 기다린다면 좋은 결실이 맺어질 것입니다.

 

 

 

벌써 벚꽃이 낱닢으로 흩날리고 있습니다. 먼저 꽃을 피운 나무는 벌써 잎새를 제법 키웠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계절에는 관심도 두지 않으면서 봄이 되면 좋아라하면서 꽃구경을 즐깁니다. 하긴 벚꽃도 누굴 위해서 피는 건 아니지요. 그저 때가 되면 피고 질뿐입니다.

 

아이들도 스스로 제 갈 길을 알아서 때에 맞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모의 극성에 밀려 온실에서 계절도 모르고 피는 꽃이나 열매를 다는 과일처럼 웃자라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꽃도 과일도 제때에 맞춰 자라야 향기도 좋고 맛도 제 맛을 내는 것처럼 아이들도 자신의 의지로 자라야 사람 냄새를 풀풀 풍기게 됩니다.

 

돈을 잘 버는 것 이외에는 목표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되어버린 이 시대는 사람이 되는 길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되는 길만 찾는 이 시대의 교육은 행복해지기 위한 길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기쁨을 모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온실에서 자란 꽃이 화려하지만 향기가 없고 크기도 크고 때깔도 좋지만 왠지 제 맛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와 같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닮아가며 어른이 됩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벚꽃을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보며 봄날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