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적 지식이나 기획력, 전문기술만으로는 집을 설계할 수 없다. 건축가는 삶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설득력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행동이나 동작을 자세히 관찰하고 복잡한 심리의 줄거리를 읽어내어 해석하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에 공감할 수 있는 유연한 마음을 가진 인간관찰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집을 순례하다’를 집필한 나카무라 요시후미
주택을 설계하는 일이 건축가들에게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이유는 오직 사람의, 사람에 대한, 사람을 위한 집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현종 시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집을 설계한다는 것은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생을 담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이충기
단독주택단지에서 떠 올린 담장과 경사지붕
양산시 물금에 단독주택만 지을 수 있도록 되어있는 택지가 있다. 부산에는 단독주택 택지로 공급이 되어도 일층은 상가, 2,3층은 다가구주택으로 지어서 단독주택은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여기는 다가구주택이나 상가주택이 아닌 순수 단독주택만 2층까지 지을 수 있다. 공급된 택지의 규모는 필지당 100여 평이라 도시형 단독주택이 아기자기하게 지어져 있다. 아직 택지에 비어있는 땅이 많이 있지만 예사롭지 않은 집들이 많이 보여서 최근 단독주택의 흐름을 볼 수 있다.
택지 공급 지침에는 경사지붕을 반드시 두어야 하며 제한된 높이의 투시형 담장만 허용하는 규정이 있다. 폐쇄형 담장을 설치할 수 없다 보니 집 안의 프라이버시를 확보하기 위한 설계자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집도 많이 있었다. 담장은 거실을 마당과 연계하여 쓰는 우리의 주거생활습관에서 집안이 들여다보는 외부인의 시선을 막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그럼에도 단지의 쾌적한 공간감 확보라는 취지 때문이라도 담장 설치를 제한하는 건 우리나라 주거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길에서 들여다보는 시선을 막기 위해 억지로 디귿자로 평면을 잡거나 거실을 이층으로 올려 마당이 무색해지는 집도 있다. 100평에 못 미치는 대지면적에서 일층에 둔 거실이 길에서 보는 눈길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담장 높이를 눈높이 정도로 잡아서 재료를 통일해 준다면 집 안의 프라이버시도 확보되고 단지 분위기도 정리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을 텐데.
담장이 없애 단지 전체가 넓어 보이는 효과를 얻으려고 했겠지만 결과는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프라이버시 확보를 위해 도로에 딱 붙여 짓다 보니 집집마다 다르게 마감된 외장재에다 독특한 형태의 집들이 동네 분위기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듯했다. 단지 분위기를 안정되게 하려면 집의 외관에 대한 규제를 색상이나 마감 재료로 한정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질감과 색감은 비슷하지만 형태처리의 변화만으로 차분한 리듬감이 있는 동네가 되지 않을까 싶다.
개성이 넘쳐 보이는 집, 설계자의 아바타?
단지의 집들을 살펴보자니 개성이 넘치는 집들이 많이 보였는데 특히 설계자의 창작 의지가 돋보이는 집이 몇몇 보였다. 그 가운데 압권은 지붕과 벽의 재료가 하나로 처리된 집이다. 한 집은 새하얀 페인트로, 또 한 집은 송판거푸집으로 한 노출콘크리트로 전체 외장마감이 되어 있었다. 두 집이 다 경사지붕임에도 처마 처리 없이 경사지붕과 벽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
두 집은 지붕재료가 상식을 뛰어넘어 무모하다 할 정도여서 설계자의 작업 의지에 머리가 숙여졌다. 경사지붕까지 새하얗게 칠해져 집이 하얀 덩어리이니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준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하얀 집이 예쁘게 보이지만 얼마나 저 고운 상태가 유지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노출콘크리트로 지붕과 벽을 일체화시킨 집은 거친 질감으로 야성미가 넘쳐 보이지만 오염과 먼지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집이 준공되는 그 시점, 설계자의 생각이 스케치로 이미지화되고 건축주와 수많은 협의를 거쳐 도면으로 정리되었으리라. 어렵사리 시공과정을 거쳐 완공이 되면 설계자는 사진으로 남겨 작품으로 기록한다. 그리고 완공된 시점으로 정지된 집의 사진은 설계자의 아바타로 쓰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현장에서는 노출콘크리트 지붕과 외벽은 계속 오염될 터인데 이를 시간의 흔적이라며 이것도 집의 역사라는 미명에 어울릴 수 있을까?
모든 존재는 무상(無常)하므로 시간은 집을 완공시점의 상태로 두지 않고 변하게 한다. 이 변화와 타협하는 유지관리의 노력과 비용은 오롯이 건축주의 몫이 된다. 단독주택을 지어서 사는 이유는 우리 가족들만의 행복을 누리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집이 지어지고 난 후의 하자 보수나 유지 관리에 발목이 잡힌다면 집에 사는 즐거움은 고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단독주택에서 지붕과 처마는 선택이 아닌 필수
단독주택에서 지붕을 모자 쓴 사람과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되겠다. 모자의 기능은 머리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모자의 챙은 그늘을 지워 얼굴이 햇볕에 타는 것을 막아준다. 챙이 길게 나온 모자는 햇볕뿐 아니라 우산을 대신해서 비를 그어주기도 한다. 머리숱이 많은 사람은 모자의 중요성을 간과하지만 민머리가 드러나기 시작하면 모자는 필수품이 되기도 한다.
머리와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그늘을 지우고 비를 긋는 기능보다 디자인을 우선으로 모자를 쓰기도 한다. 멋쟁이들이 쓰는 모자는 선택의 폭이 넓지만 멋을 부려야 할 때만 쓰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머리숱이 모자라거나 탈모가 걱정이 되는 사람에게 모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수품이다. 그래서 모자를 선택하는 기준은 자신에게 필요한 쓰임새를 철저하게 따진 다음 모양새도 살피게 될 것이다.



단독주택에 모자처럼 지붕을 씌우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집을 예로 들자면 한옥이 된다. 한옥에서 지붕이 없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시대의 단독주택도 마찬가지이다. 외장재의 관리에서도 그렇지만 외벽에서 발생되는 하자 요인도 처마에서 거의 사전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 창문을 열고 빗소리를 듣거나 남향집에서 여름 햇살이 집안에 들지 않는 게 지붕과 처마의 역할이라고 하면 선택적으로 설치하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경사진 지붕의 실내 공간은 거실에서 적정한 높이를 가질 수 있어서 깊은 공간감이 주어진다. 평지붕으로 짓는 단독주택이나 아파트에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풍성한 공간감을 얻게 된다. 또 경사 높이를 조정하여 다락을 설치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는데 수납공간이나 취미실이나 객실 등으로 다목적실로 쓸 수 있으니 경사지붕은 결코 포기할 수 없지 않은가?
최근에 평지붕으로 지은 단독주택에 행정 처리 없이 경사지붕을 설치하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다. 위법 여부를 따지면 불법인 게 사실인데 그렇게 지붕을 설치하는 건 옥상 누수나 단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적법 여부를 따져 단속 위주로 처벌하기보다는 예외 규정을 마련해서 미관과 편의를 도모하는 게 옳다고 여긴다. 평지붕으로 집을 지어 살다가 경사지붕으로 고쳐서 살도록 하는 건 위법 여부를 따지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모자를 꼭 챙겨 쓰는 사람에게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매우 절실해서 멋을 부리기 위해 모자를 쓰는 경우와 다르다. 단독주택에서 처마를 가진 경사지붕이 주거 생활의 편의성에서나 집의 유지 관리에 꼭 필요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집을 지어 살다가 경사지붕과 처마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을 때는 아주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 이유는 모자를 꼭 챙겨 써야 하는 사람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어성경제신문 '더봄' 연재 - '김정관의 단독주택 인문학' 25
원문 읽기 : https://www.woman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7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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