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SOS를 보냈다. 지인의 친구가 500 평 가까운 집을 짓고 있는데 고민이 많다는 것이다. 설계는 딴 사람이 했는데 공사 중에 생긴 고민은 내가 해결해줘야 한다고? 그런데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닌 지인이라 모른 척할 수가 없어 고민남 건축주를 만나보기로 했다.
역시 문제의 근원은 건축주에게 있었는데 정확한 프로그램을 제시해 주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설계도로 집이 지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설계자는 마치 위임받은 양 작업을 진행한 셈으로 도면이 만들어졌고 공사마저 시공자가 제 요량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다행히 외부 마감 공사까지만 마무리 중인 상태여서 수습할 여지가 있어 보여서 다행이긴 했다.
건축주의 집을 설계하는 건축사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건축사가 하는 일을 ‘건축물에 관한 한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한다. 건축물의 설계자라는 역할은 마치 엄마가 아이를 출산하는 일과 같다. 아기를 잉태해서 배에 넣어 기르는 열 달은 건축사가 설계하는 기간이라 보면 어떨까 싶다.
그런데 건축주가 집을 지으려고 하는 프로그램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다고 건축사 임의로 설계를 진행해도 되는 것일까? 공사는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데 건축주는 이 집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건축사와 건축주가 소통되지 않은 상태로 작업된 설계도로 집을 짓는 건 아이를 출산했는데 기형아이거나 선천성 질병을 가진 아이인 것과 다름 아니다.
건축사와 건축주가 제대로 소통되지 못한 채 작업된 설계도로 지어진 집은
아이를 출산 했는데 기형아이거나 선천성 질병을 가진 아이인 것과 다름아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지 40년, 건축사 자격을 취득한 지 30년이 지났다. 잠잘 시간도 모자랐던 건축사 사무소 실무 십 년을 거쳐 건축사로 30년이다. 그렇지만 지금도 이 일이 두렵고 내가 작업한 설계도로 집이 지어지는 게 조심스럽다.
부산에만 건축사가 1400명, 올해가 지나면 1500명이 될 것이다. 건축물은 지었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부수고 다시 지을 수 없다. 그런데 설계를 한 달, 혹은 두세 달로 마치고 그 도면으로 집을 짓는다. 한번 지어지면 짧게는 수십 년, 길게 보면 백 년을 쓰게 될 집인데 설계 계약을 하면서 건축허가를 종용한다.
건축사들은 능력으로 경쟁하지 않고, 아니하지 못하고 설계비를 다른 건축사보다 싸게 불러 계약하려고 애쓴다. 설계비는 건축물의 규모로, 평당 얼마로 책정될 수 없다. 돈을 얼마나 들여지을 집인데 설계비를 싸게 부르는 건축사에게 일을 맡기는 걸까? 제대로 일 해야 하는 건축사라면 설계비를 남들보다 싸게 받을 수 없다.
어떤 건축물일지라도 건축사만이 애착을 가질 수 있다. 건축을 모르는 건축주는 전문가가 다 알아서 해줄 것이라 믿을 것이다. 그 믿음이 절대적이라야 건축사는 자신의 능력을 일에 쏟아부을 수 있다. 그런데 건축주는 관념적 믿음만 있을 뿐 능력을 갖춘 건축사를 어떻게 찾아야 한다는 걸 모른다. 왜 모른다고 단언하는지는 집을 설계하는데 필요한 정당한 설계비가 얼마나 되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는 걸 보기 때문이다.
건축사는 건축주의 신뢰 만큼 설계 작업에 자신의 역량을 다할 수 있고
그 신뢰의 증표는 충분한 설계 기간과 그에 맞는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설계가 마무리되기 전에 어떤 집이 되어야 하는지, 그 집을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공사에 들어가게 되면 그야말로 사상누각으로 지어지고 말 것이다. 건축주는 마냥 집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집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치밀하게 따져보지 않고 공사비를 들여 집을 짓는 건 목적지 없이 차를 모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건축사를 제대로 선정해서 설계를 진행하게 되면 건축주는 자신과 가족들이 살 집에 대해 알게 된다. 지금은 설계 진행 과정을 3D-Modelling으로 가상의 집을 미리 볼 수 있다. 건축주가 설계도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수록 설계 기간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건축주가 설계비에 인색해서는 좋은 설계도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건축사는 제도사가 아닌데 도면 값만 나오면 일을 하겠다고 건축주에게 설계비를 던지듯이 제시한다. 그런 설계비로는 계약하자마자 도면을 바로 그려서 허가 접수를 마쳐야 한다. 그러면 건축주가 지으려고 하는 집에 대한 계획 설계와 협의는 최소한으로 해야 하니 제대로 된 설계도는 기대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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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는 착공을 한 상태에서 설계도면 검수를 해달라고 찾아왔던 건축주가 있었다. 1500 평이나 되는 교회였는데 꽤 괜찮아 보이는 외관 말고는 문제투성이인 설계도였다. 다행히 ‘설계 리모델링’ 계약을 하고 작업을 해서 세상이 다시없는 교회라는 평가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지금 문제점만 찾아내고 있는 이 집은 온전하게 쓸 수 있게 공사를 마칠 수 있을까? 내 능력도 한계가 있어서 최상의 결과는 장담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 문제점을 해결해 보려고 한다. 건축주에게는 누가 보아도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좋은 집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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