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경기도 상황이 녹녹지 않겠지만 건축 경기는 얼어붙어서 풀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건축 경기가 이런 상태인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금융 환경이 좋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단독주택만 해도 은행 융자를 받지 않고 짓는 사람이 드물다. 그런데 금리 등 대출조건이 돈을 빌릴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경기가 풀려 집을 지을 수 있는 자금 계획을 짤 수 있게 되면 설계를 서두르게 된다. 어떤 건축주는 설계 계약을 하면서 건축허가를 언제까지 받을 수 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아이를 가지지도 않았는데 출산 계획을 잡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설계 기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부족하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여생과 함께 할 우리집은 도깨비방망이 두드리듯 뚝딱 설계도가 나오는 걸로 알면 곤란하다.
건축사를 곤혹하게 만드는 설계비 얼마요?
집 짓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전문가는 건축사라고 할 수 있다. 건축주가 주군이라면 건축사는 책사라고 할 수 있다. 설계는 고민할 시간을 충분하게 잡고 시작해야 하므로 집 지을 계획이 섰다면 건축사를 정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대부분 현명한 지출의 원칙으로 가성비를 꼽는다.
내 집을 짓는데 건축사를 정하는 일도 가성비를 적용할 수 있을까? 설계 능력은 A급인데 설계비는 B급 수준으로 할 수 있는 건축사를 찾으면 가성비 원칙에 충족될 수 있겠다. 그런데 설계비는 건축사사무소 몇 군데와 접촉하면 감을 잡을 수 있지만 능력 검증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지금 대부분 건축사들이 부르는 설계비는 액면가로 30년 전 금액이다. 그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사실이다. 건축사 자격을 취득한 지 30년 된 나의 설계 계약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면 30년 전에는 건축사가 폭리를 취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때가 지금보다는 일하는 여건이 조금 더 나았을 뿐이었다.
공공 건축물 설계 대가는 근거가 있지만 민간 건축물 설계비는 시장 경제에 맡겨두고 있다. 정부의 정책에 의해 전문 자격증 남발로 건축사 수는 대책 없이 늘었다. 건축물은 대형화되거나 단지화되어 건수는 주는데 건축사는 많으니 설계비는 꼬시래기 제살 뜯어먹는다는 말처럼 하향 일로로 지금에 이르렀다.
단독주택 설계를 면적 기준으로 가성비를 따져 건축사를 찾는다면 애당초 바람직한 집 짓기와 다른 길로 가게 될 것이다. 다른 용도로 짓는 건축물도 그렇겠지만 특히 단독주택은 가족들의 행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집을 짓지만 나중에는 그 집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 말처럼 설계는 집 짓기의 첫 단추를 꿰는 일이다. 우리 가족들의 행복이 설계자의 손에 달려 있다면 설계비부터 물어서 찾을 일이 아닌 건 분명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계비 얼마요?
지인의 소개로 단독주택을 지으려고 건축사를 찾는 분을 만나게 되었다. 명함을 전하며 내 이름을 밝히니 대뜸 하는 말이 ‘설계비 얼마요?’였다. 자리에 앉으라는 말도, 물 한 잔 마시기도 전에 설계비부터 물어오니 당혹스러웠다. 나는 다른 용도는 설계비를 결정하면서 망설이지만 단독주택은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건축주 분께 망설임 없이 설계비를 얘기했다. 건축주 분은 그러냐고 하며 현장을 가보자며 앞장서는 것이었다. 앉아보지도 못하고 물 한 잔 마시지도 않고 그 당시 건축주 분이 살고 있는 집이었던 현장으로 갔다. 살고 있는 집에 한 필지를 더 사서 정원을 꾸몄는데 집만 허물어 새로 짓고 싶다고 했다.
기획 단계를 진행하고 일주일 뒤에 계약하는 날이었다. 건축주는 설계비는 깎으려고 묻는 게 아니라고 하며 근거가 궁금하다고 했다. 내가 대답을 하기 전에 건축주도 건축 관련 일을 하고 있어서 건축사를 많이 안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알고 있는 건축사들은 설계비를 천만 원 이상 얘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집터가 180 평인데 위치로 보면 최소 평당 천만 원은 호가하겠습니다. 50 평 정도로 지으실 것이라 하니 공사비는 최소 평당 천만 원이 들겠지요? 그러면 공사비와 대지가만 해도 23억이 들어가겠습니다. 건축주 분이 건축사라면 설계비 천만 원으로 건축사가 건축주 입장에 서서 일할 수 있겠습니까?”
건축주가 설계비부터 물었던 이유
건축주는 내가 얘기하는 설계비의 근거를 듣고는 무릎을 쳤다. 사실 그 비싼 땅에 단독주택을 짓는 걸로 결정하기까지 건축주 부부는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있던 건축사들로부터 설계비가 천만 원 이하라는 얘기를 듣고 설계를 의뢰할 수 없었다고 했다. 건축주로서는 어떤 집으로 지어야 할지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그 설계비로는 안심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내가 제시했던 설계비는 천만 원을 곱절 이상으로 상회하는 금액이었다. 단독주택을 수십 채 작업하면서 설계 기간은 짧으면 3개월, 협의가 길어지면 6개월이었다. 그 일에만 매달리는 건 아니지만 단독주택은 규모로 따질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설계 기간 중에 가장 고심하고 숙려 해야 하는 일은 건축주와 가족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느냐에 대한 확신에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물론 어떻게 살 수 있는 집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소프트웨어만큼 어떤 집으로 지어야 하는지 공사비가 들어가는 하드웨어를 다듬는 작업도 만만찮은 일이다. 공사비는 현실적인 문제라서 타협이 쉽지 않지만 지어지고 나서 다시 보완할 수 없으니 타당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공사비는 적게 들이고 집은 마음에 들기란 어렵지 않겠는가?
같은 컵이라도 머그컵은 내가 쓰다가 남에게 주는 건 실례다. 그렇지만 작가가 있는 컵이라면 오래 써서 흠집이 났는데도 받을 사람이 많지 않은가? 우리 식구만 편히 살 수 있으면 그만인 집은 부동산 가치가 없다. 그렇지만 누구나 우리 집을 부러워한다면 언제든지 제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드웨어에 신경을 써야 하는 근거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얘기가 아닌가?
이제 건축사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근거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단독주택을 지을 계획이 있는 분이라면 지금이 설계를 해야 할 때이다. 설계는 오래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좋다. 아니 우리 가족의 행복을 담아야 할 우리 집인데 한두 달 만에 설계도를 완성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설계 기간을 오래 가져야 할 이유는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 깊은 사유 속에 좋은 설계를 해 줄 수 있는 건축사를 위하는 일이기도 하다. 건축주와 건축사의 오랜 대화는 설계도를 확정할 근거가 된다. ‘어떻게 살 수 있는 집’은 건축주가 참여하게 되지만 ‘어떤 집’으로 설계를 마무리하는 건 건축사에게 위임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로 만족할 집이 될 수 있다.
‘어떻게 살 수 있는 집’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어떤 집’으로 설계도를 마무리하는 작업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건축사가 어디에 있을까?
여성경제신문 '더봄' 연재-'단독주택 인문학' 12
원문읽기 : https://www.woman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8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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