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설자의 에세이 차 이야기 061123
보이차 개인 교습
그날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보이차 차력이 오래된 분으로부터 좋은 차가 손에 들어왔으니 같이 마시자는 연락을 받았다. 이 분은 지난번 차 모임인 다연회에서 만난 분이었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고등학교 선배님이셨다. 선후배지간이라는 인연은 따질 게 없는 사이로 급진전되니 이런 기회가 마련되나 보다. 일과를 급하게 정리하고 선배님 댁으로 향했다.
버섯 쇠고기 전골에다 굴회까지 거하게 차린 저녁에 황망할 따름이었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바로 선배님의 차실에서 차를 시작했다. 차실은 책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이 있고,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몇 점의 수석과 전각으로 주인의 취향을 알 수 있었다. 유리문이 달린 장식장에는 몇 점의 자사호와 개완, 찻잔이 보였다. 범상치 않은 다구들을 보면서 이제 막 보이차를 시작한 내 눈으로도 그의 내공이 느낄 수 있었다.
번듯한 차상이 아닌 간소한 2인용 차반을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이 앉았다. 차반에는 작은 찻잔 두 개가 있고 자사호도 크기가 작다. 어찌 보면 애기들 놀이에 쓰는 소꿉 같은 크기이다. 왜 이렇게 작은 그릇을 쓰는 것일까?
대우령
처음 마시는 차는 대만차인 대우령이다. 냉장고에 꺼낸 대우령은 자사호에 우리는데 이렇게 작은 자사호는 처음 보았다. 발효도가 낮은 차는 전용 냉장고를 마련하여 보관하는 것이 좋다고 하신다. 와인 냉장고도 있으니 차 전용 냉장고도 있으면 좋겠다 싶다. 좋은 차는 세차하기도 아깝다며 첫 잔은 선배님이 마셨는데 얼마나 차를 사랑하는지 알 것 같았다. 처음 마셔본 대우령은 그 향기가 마음까지 맑아지는 듯했다.
여아차
다음 마신 차는 여아차였는데 오래되지 않은 차인데도 고삽미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순했다. 보이차는 떫고 쓴맛이 많은데 여아차는 녹차처럼 향기로웠다. 엽저를 보니 일아삼엽인데 아주 어린잎이었다. 엽저를 보는 눈부터 길러야 한다고 얘기하시며 차를 가리는 데 있어 엽저는 결코 속일 수 없다고 하신다.
습 먹은 노차
이제 오늘 마실 주인공 차가 등장한다. 오래 묵은 진년차인데 습을 먹은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보이차를 창고에 보관하다 보면 생기게 되는 곰팡이를 털어낸 흔적이다. 오래된 차에서 보관 상태에 따라 차의 가치가 결정되기는 하지만 차의 모료는 상당히 좋다고 한다.
탕색은 등황색에서 붉은색으로 진행되는 맑은 홍색이었다. 고삽미는 많이 순해졌으나 습을 먹은 영향으로 입안에 부담스러운 향미가 느껴졌다. 생차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부담이 된다고 말씀드리니 이것이 대부분 노차나 진년차가 가지는 한계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오래된 보이차를 습을 전혀 먹지 않은 좋은 환경에서 보관된 것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 말씀했다. 숙차는 마시지 않고 생차만 마셔온 선배님의 구미에는 괜찮은 차라고 했다. 나는 아직 보이차를 마신 지 얼마 되지 않지만 거의 숙차로 마시고 있다 보니 마시기가 부담스럽다고 말씀드렸다.
광운공병
그러면, 하시면서 비장의 카드라며 차를 꺼내신다. 그 차는 지금은 구하기가 쉽지 않은 광운공병이었다. 지난 차회에서도 마셨지만 내 입에는 불편한 부분이 있었던 차였다. 바로 앞에서 얘기한 습 먹은 차에 대한 느낌이다. 이건 자신이 있다고 내놓으시니 기대가 되었다.
선배님은 자사호를 바꾸어 광운공병을 우리셨다. 광운공병은 60년대 차이니 내 나이와 비슷한 세월을 먹었으니 거의 골동차라고 할 수 있다. 귀한 차를 마시는 자리라 자세를 고쳐 바로 앉아서 차를 기다렸다. 우선 탕색은 붉은빛이 선연한 것이 내가 북도팀에서 구입해 마시는 05노동지 숙차의 색 그대로다. 생차에서 저 색이 나오다니 세월이 만들어낸 후발효차의 가치라고 할 수 있겠다. 조심스럽게 잔을 들어 입안에 머금으니 삽미는 간데없고 약간의 고미가 차기를 느끼게 하면서 목으로 넘기니 회감이 바로 올라왔다. 바로 이것이 제가 그동안 마셨던 보이차의 정점이랄 수 있겠다. 습을 먹은 흔적을 볼 수 없는 광운공병이었다.
골동 보이차
그리고 보너스, 선배님은 장의 한쪽에 고이 간직한 자사호를 꺼내니 그 안에 두 조각의 보이차를 보여주셨다. 기압이 돌덩이처럼 되어 있는데 방차인 듯해 보였다. 이건 정말 골동차라고 하시며 숨겨두듯 고이 간직한 차를 보여주셨다. 보여주기만 하고 넣으시려나 생각했는데 그중에 작은 조각을 차호에 넣었다.
차가 물을 머금자마자 그대로 따러 냈다. 이 차는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순간 바로 감미가 입안에 확 퍼졌다. 고미도 삽미도 간데없이 보이차에서 이런 맛이 만들어지다니... 그야말로 환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몇 잔을 연거푸 마셔도 돌덩이처럼 단단한 차는 풀어지지 않는다. 선배님은 이 차호에 탕색이 우러날 때까지 마실 거라고 하셨다.
벌써 시간이 밤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좋은 사람과 좋은 차가 어우러지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차 자리를 정리하는 얘기를 나누었다.
'고삽미에 습향까지 더해진 차를 억지로 마시는 건 차생활이 아니라 노차를 꼭 마셔야 한다는 일종의 차수행 생활이나 다름없다. 쓰고 떫은맛을 이겨내면서 마셔야 한다는 건 기호로 차를 마시는 즐거움을 앗아가는 것이지 않을까? 오늘 마신 광운공병 정도가 아니라면 비싼 노차를 고집하며 진짜를 찾는 수고를 하는 것보다 좋은 숙차를 마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라고 마무리하는 말씀을 주셨다.
노차보다 좋은 숙차
선배님은 보이차가 들어오는 초기에 습창차에 입맛을 버렸는데 지난 십 년간 마실만한 노차를 찾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마실만한 노차는 가격대도 만만찮아서 이제는 숙차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보아야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다 보니 숙차를 즐겨 마시는 내가 부럽다고 하신다.
이제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선배님은 제가 좋다고 하는 여아차에, 흑차, 거기다가 조금 있는 광운공병 마저 꽤 많은 양을 나누어주셨다. 얼마나 황감했는지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보이차 초보 다인인 내 얘기를 충분히 존중하며 보이차의 세계로 진일보시키는 차 사부의 개인교습은 내 차생활의 수준을 훌쩍 올려주셨다.
내 시각으로 보면 선배님은 우리 다회의 큰 어른이 아닐 수 없다. 12월 차모임에서 다른 다우들의 소장 차도 맛보자는 말씀을 뒤로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선배님과 차를 함께 마시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는 자리였는데 이제는 고인이 되신 선배님이 너무 그립다. (2006. 11. 23)
무 설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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