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 이야기/에세이 차 이야기

어느 봄날 밤, 차향을 음미하다 미소 짓는 이유

무설자 2025. 4. 25.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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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를 거의 스무 해 가까이 마셔오고 있지만 그 향미를 글이나 말로 표현하는 건 여전히 어렵습니다. 남이 쓴 시음기를 읽으며 글로 표현된 차맛을 느껴보려고 애써 보지만 솔직히 잘 와닿지 않습니다. 향미를 세세히 이런 저런 꽃과 과실의 향을 들어가며 보이차의 향미를 표현한 분들이 대단하다고 탄복합니다.

 

이십 년 가량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차를 마시며 글을 쓰고 있는데도 향미를 구분해서 말하는 건 쓰고 달다는 정도입니다. 시음기에서 과일향에 꽃향기까지 세세하게 드러내는 글을 읽으며 이 분들은 얼마나 좋은 보이차를 마신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나는 아직도 글에 표현된 향미를 느껴 보려고 용을 써보지만 아직 만족할 만큼 다가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좋은 차를 만나지 못했거나 그런 차를 가지고서도 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요?

 

보이차를 막 시작했을 무렵에 글을 쓰면서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우화의 예를 들었었답니다. 남이 그렇다고 하니까 덩달아 나도 그렇게 느낀다고 한다는 얘기지 않을까 싶다는 말이었지요. 그렇지만 나는 느끼지 못하는 보이차의 향미를 제대로 감지하고 있는 분을 폄하해서는 안 되겠다고 반성합니다. 내가 느끼기 못하고 있다는 나만의 부족함은 아마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여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이나 말로 딱 떨어지게 표현할 수 있는 차의 향미를 생각해 봅니다. 보이차의 향미는 은근하면서 복합적이라서 향이나 맛이 청차나 녹차처럼 뚜렷하지 않습니다. 차의 향미는 쓴맛, 단맛 등 오미가 사람마다 다르게 다가오고 찻물과 온도, 다기에 따라 향미를 다르게 만들어지지요. 이러다 보니 보이차의 향미를 이렇다고 말하더라도 공감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필요(?)에 따라 보이차의 맛과 향을 굳이 말로 표현하자니 과일도 나오고 꽃도 들먹여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거기다가 이런저런 수식어를 써서 줄기에 가지를 붙이고 잎사귀를 더한 데다 꽃까지 붙이면 듣는 이들이 혼돈에 빠지고 맙니다. 거기다가 땅 밑에 있는 뿌리까지 들먹이면 신비감을 넘어 불신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禪家에서 선사들이 깨달음을 얻은 뒤에 이런 과정을 거치면 누구라도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며 글로 남기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 경지를 글이나 말로 아무리 잘 썼다고 하더라도 온전히 전해지기는 어려울 겁니다. 후학들이 그 길을 거쳐 도달했던 분도 있겠지만 책만 보고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깨달음은 오직 스스로 체득할 수밖에 없으며 그 경지를 같은 내용으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글이나 말로써 깨달음이 온전히 표현될 수 없다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것은 지식의 축적으로 얻을 수 있는 건 많이 알게 되는 것이고 깨달음은 오로지 수행을 통해 다다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차를 마셔서 다가오는 향미도 글에서 얻은 기준에 맞추려 한다면 만족한 결과에 이를 수 없을 겁니다. 

 

수행을 통해서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과 같이 차의 향미를 온전히 느끼려면 마시고 또 마시면서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 맛도 없다고 밀쳐 두었던 차를 우연히 마셨는 데 있는 듯 없는듯한 미미한 향미가 다가와 혼자 감탄하며 미소 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 향미는 아마도 글이나 말로 설명하거나 남에게 전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글이나 말에 의존하여 서둘러 차의 향미를 느끼려 한다면 좋은 차를 찾느라 돈을 낭비하고 말지도 모릅니다. 

보이차는 어차피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알게 된다고 하지만 방 하나를 빼곡하게 채우고도 바라는 차를 구하지 못했다고 하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가성비로 차를 양으로 구입하는 건 온전한 향미를 음미하려는 노력과는 반대의 길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제가 보이차에 막 입문했던 무렵에 선배님께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좋은 차 한편을 구해서 그 차 한 가지만 끝까지 마셔보세요. 그 차를 집중해서 마셔야 하고 되도록 짧은 시간에 다 마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차가 앞으로 마시게 될 다른 차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사실 보이차를 한 편만 계속 마시기는 쉽지 않지요. 초보일수록 보이차에 익숙해지는 게 쉽지 않아서 별 맛이 없는(?) 차 한 편을 다 마시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차 저 차 번갈아 마시다 보면 차맛에 대한 기준이 잡히지 않아 방황하는 시간이 많아질 것입니다.

 

차 한 편을 꾸준히 마시는 게 쉽지 않다면 몇 종류를 정해서 매일 부지런히 많이 마셔보는 겁니다. 그러노라면 차마다 다른 차이를 느끼게 되는 때가 옵니다. 그때 차의 향미에 대해 선배들에게 묻거나 글을 통해 자신이 느낀 맛을 비교해 보면 조금씩 알아가게 되더군요.

 

 

 

보이차는 처음부터 글로 읽거나 말로 설명을 들어서는 맛과 향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차를 마시되 꾸준하게 집중해서 마셔야 하며, 차에 관한 지식을 책이나 글로 알아가는 것도 좋지만 차를 오래 마신 분과 자주 찻자리를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차를 온전히 즐기는 차 생활에는 왕도가 없으니 오로지 꾸준히 마시면서 생기는 궁금증을 지식으로 채워야만 무너지지 않는 공든 탑을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 설 자